약 5년 전이지요
매주 강화도로 갔지요
제주도 올렛길 처럼 강화도에도 나들길 이란게 있는 것을 알고
그해 뻔질 거리며 강화도를 들락 거렸지요
그래서 총 15개 구간인 전구간을 완주했답니다
강화가 생각보단 많이 크더랍디다
역사적 사실도 많구요
그당시 상당히 매력 덩어리 라고 생각했었지요
최근 몇년은 산만 쫒아 다녔잔아요
이젠 힘도 부치고, 다닐 만큼 다녀보기도 했고요
꽤가 나는데 습관 때문에 놀수는 없구 그래서 다시 강화가 생각났읍니다
구간이 20개로 늘어났네요
천천히 할랍니다
1년이되건 2년이되건 서둘지 않고 천천히요
아래 사진은 1구간 중간에있는 연미정입니다
고려때 만든걸로 추측된다지요
역사적인 회담도 많이 했다던데
지금도 북쪽땅과 접해있읍니다
모양은 죽여주지요
거기서 보이는 강줄기가 제비꼬리를 닮아서 연미정이랍니다
강화 나들길은 총 20개구간입니다
아주 짧은 구간도 있지만 보통 6시간 기준으로 짤랐나 봅니다
그 첫구간 1코스입니다
심도 역사문화길로 이름 지어져있구요
강화 버스터미널에서 강화대교가있는 갑곶까지 약 18kM 거리입니다
철종이 머물어서 궁이된 용흥궁을 비롯해서 많은 역사 유물을 답사합니다
아래 지도의 노오란선이 코스입니다
이건 제가 어제 다녀온 트랙입니다
위 지도와 같이 간다고 했는데 조금은 다르네요
하지만 20코스하다보면 겹치는곳이 많아서 다 거치게 됩니다
gpx트랙 첨부합니다 필요하신분 받아가세요
산행기록입니다
16.33kM 이지요
안내 지도보다 조금 작은것이 아마 조금 다르게 가서 그런 듯하네여
시간도 넉넉하게 걸었답니다 거진 7시간 걸렸지요
역사 해설도 듣고 밥도 먹구요 전혀 서두르지 않았답니다
강화버스터미널입니다
여기서 시작이지만
여기 관광안내소에서 여권을 발행합니다
지도도 주지요
여권에 1코스 비자를 받구요 출발해야 정식 출발입니다
지난번 해보았기에 바로 그렇게하고 출발합니다
SK마트 선전하냐구요?
네 선전 할만 합니다
왜냐구요?
여기가 그 상가 주차장입니다
물론 무료 주차이지요
당연히 선전 해주어야 합니다
여유있게 주차하고 배낭메고 정식 출발합니다
어딜가냐구요?
첫번째 목표는 용흥궁입니다
길건너고요
무조건 강화 경찰서 방향으로 갑니다
물어 볼 것도 없읍니다
경찰서 골목 다음 골목이지요 골목으로 들어서서 첫번째 골목이 용흥궁 골목입니다
여기가 첫번째골목인가?
얼핏 그냥 지나칠수 있읍니다
이게 어찌 문화재있는 골목이라하겠어요
하지만 이리루 들어와야 합니다
조금 들어오면 왼쪽 기외와 지붕 보이지요
거기가 용흥궁입니다
집 이름에 궁이 붙었지요
임금이 살았던 곳에는 "궁"자를 붙인다지요
이곳은 철종이 임금이 되기전 머물렀던 곳이라서
"궁"자를 붙였지요 용흥궁이랍니다
비슷한 곳이 고종이 자란 곳
즉 흥선 대원군의 집을 운현궁이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강화도령이란 별명으로 잘 알려져있는훗날 철종이 될 이원범은 전계대원군 이광의 3남으로
이원범은 어린 시절에는 그의 형들과 함께 왕가의 몇 안되는 왕족으로 그럭저럭 살았다.
이후 아버지가 10살 때 돌아가신 일 말고는 큰 어려움 없이 지냈지만,
14살 때인 1844년에 민진용(閔晉鏞)이 큰 형 이명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계획하면서 기구한 운명을 맞게 된다.
이명은 처형되고 이원범은 연좌제로 작은형 이욱과 같이 교동도로 유배되었으며,
얼마 못가 강화도에 다시 유배되었다.
이후 형과 함께 19살 때까지 5년간 농사를 짓고 나무나 베던 원범은,
강화도에서 왕족이 아닌 평범한 백성으로 생을 마칠 뻔했으나...
그때 살던곳이 이곳 용흥궁이다
안채입니다
용흥궁은 철종이 살때 이런집이 아니었는데
철종이 왕이되자 그때 강화군수가 철종에게 잘보이려고 기와집으로 이렇게 지은것이랍니다
화장실이 궁금하지요
확인해 봅니다
그냥 어렸을 때 그 구조 입니다
푸세식
전통다도 예절교육관으로 쓰이고 있는듯합니다
관리인도 없지요
뒷편 계단위에있는 사랑체입니다
뜰에 목련이 막 꽃망울을 텃뜨렸네요
그리고 계단이지요
이계단위는 어떨까요?
그계단으로 들어오시는 분도 있읍니다
계단에 올라서서 용흥궁을 바라봅니다
주택가에 붇혀있네요
예전 철종이 왕이되기전 살았던 집이라지요
이원범 시절 범이라 불리우며 일반인으로 있을때요
집만 비뀌었지 이런 삶이었을 겁니다
계단 넘어 담장 밖입니다
높은 곳에서 용흥궁을 바라다보고 있는 건물이있지요
성공회 강화성당입니다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1889년코프가 초대 한국 주교로 영국에서 서품을 받음으로써 시작되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한 사람의 신자도 없었고,
한국인에게 처음 세례를 베푼 것은 주교 축성이 있은 지 7년 뒤인 1896년 6월 13일강화에서였다.
대한성공회에서는 이러한 인연으로 강화에 제일 먼저 성당을 건립한 것인데,
대한성공회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게 되었고,
현존하는 한옥 교회건물로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유럽의 바실리카(Basilica)양식과 동양의 불교사찰양식을 과감하게 조합시켜 건립하였다.
그래서 인지 성당이 많이 친숙해 보입니다
일단 성당 계단에서 기념사진 올립니다
오늘 저와 1코스를 같이 하시는 분이지요
저와는 벌써 30년을 넘게 같이 살고 계시는 분입니다
정말 고맙게 동행해 주셨답니다
박수~~
건물이 불교양식이듯이
종도 불교의 범종을 닮았네요
타종부분이 십자가로 된것 빼고는 법종이지요
오늘 일요일이라
미시가 있는가봅니다
들어갈수가 없지요
주변만 볼것입니다
본당 벽면입니다
왕궁의 벽면을 보는듯하지요
공사중인 사제관이있구요
사제관도 꼭 사찰을 보는듯합니다
성공회 성당을 내려오면
강화 3.1운동 기념비도있지요
눈으로 둘러봅니다
그리고 고려궁지 가는길에
강화문학관이있군요
들어가 보아야지요
1층전시실입니다
시대별로 강화와 관계되는 문학을 기술해 놓았읍니다
고려시대
조선시대
그리고 강화 학파도 언급되어있구요
팔만대장경 탁본 체험도있읍니다
반야신경이 인쇄되었읍니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와 봅니다
대형전시실에는 조경희 수필문학관이있읍니다
조경희 작가의 유품이있지요
좀더 자세히 봅니다
이분이 강화의 여인 조경희 작가 랍니다
2층구석에
북카페가 있네요
뭘까? 궁금해요
아주 작은 방인데
작은 테이블2개
쑈파1개
벽에는 책장이 있네요
구석에는 커피먹을수 있도록 정수기도 있구요
우린 집에서 싸온 커피로 쉬는시간을 가졌답니다
아무도 없으니 더욱 커피맛이 나네요
충분히 쉬고 갑니다
내려오면서
관장님인듯한 분에게 하소연했답니다
대장경이 잘 복사가 안된다구요
손수 시범보여주시네요
감사합니다
이제 다음을 가야지요
여기는 고려궁지입니다
왠 고려궁?
용흥궁? 같이 임금이 살던집?
네 맞읍니다
고려가 개성에 도읍을 했었지요
1232년 몽고가 기승을 부릴때를 침공에 대비해서 강화도로 천도를 했다지요
그때 이곳에 궁궐을 지었답니다
하지만 고려가 몽고에 항복하고 다시 개성으로 돌아갈 때 궁궐은 몽땅 허물고 없어졌답니다
그래서 지금 이안에는 고려궁에대한 것은 하나도 없구요
다시 복원하여 지어졌지만 이대문 (승천문)만이 고려궁의 정문임을 표시하고 있답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있어요?
매표를 해야지요
그런데 강화곳곳의 입장료가 다 표시되어있네요
여기서 모두 같이 사면 활인된다지요
오늘은 고려궁지만 지불합니다
그리고 바로옆에 문화해설사가 계십니다
당연히 부탁했지요 같이 궁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곳이 고려궁지이고요
그안에 강화유수 동헌과 외규장각이 있음을 알리는 안내표지입니다
강화유수 동헌입니다
강화유수? 유수?궁금하잔아요
중국 송나리 제도를 따온것으로
하나는 황제 부재시에 유수를 두어 수도를 지키게 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옛 도읍지에 유수부를 두어 행정을 담당하게 한 것이다.
강화 유수는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로 피신했다가 환도 뒤 이곳에 유수를 두었으며.
1636년 병자호란 이후에는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수어청(守禦廳) 체제를 강화하면서 광주 유수를 두었고.
그리고 1793년(정조 17) 정조가 왕권을 강화하기 화성(華城 : 水原) 에도 유수를 두었단다.
그만큼 중요한 지방 행정관이 이곳 강화유수란 이야기이다
강화유수의 집정 모습을 밀납인형으로 만들어 놓아
이해하기 쉽게 보여주고있고
품위 높은 유수의 모습입니다
이곳 또하나의보고가야할 외규장각입니다
규장각은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궐내에 설치되었다.
역대 왕들의 친필·서화·고명(顧命)·유교(遺敎)·선보(璿譜) 등을 관리하던 곳이었으나 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해
일종의 왕실 도서관이라 하겠다.
처음 설치시 창덕궁에 설치되었으나 고종때 경복궁으로 이전하였고
현재는 서울대학교로 이전 보관하고있다
외규장각은 규장각의 도서를 분리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이다.
외규장각에는 주로 역대 왕들의 글과 글씨, 어람용 의궤 및 주요 서적, 왕실 관련 물품 등을 보관했었지요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외규장각 의궤를 포함한 359권의 서적이 약탈되고
수천 권이 불에타 소실되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이후 프랑스 파리 국립 도서관에 외규장각 도서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한국 정부는 이 도서들에 대한 반환을 추진해 왔어요.
그러나 프랑스는 2010년 3월, 한국 정부의 공식 요청에 5년 단위 갱신의 대여 방식으로 반환에 합의하여
현재는 임대형식으로 반환되어있답니다
여기 이것들은 모조품입니다
의궤는 국가 의례및 왈실행사 전반에 관한 상황을 준비단계부터 사후처리까지 기록해 놓은 책을 말한다지요
예전에 이곳에 보관했던 주요 의궤목록입니다
고려궁지가 복원중이지요
복원에대한 설명이구요
병인양요 당시 파손된 궁지의 모습을 주민들의 구술을 화가를 통하여 그려논 궁전도입니다
외규장각 앞에서 바라본 강화산성의 남장대 모습입니다
오늘 고려궁지를 열심히 설명해주신
문화역사 해설가 이십니다
고맙습니다
고겨궁궐의 대문 승천문입니다
들어올때는 동쪽 문 나갈때는 서쪽문을 사용한답니다
다시말해서 우측통행이지요
우측문으로 나와서 나들길을 계속해야지요
이제다시 나들길 1코스를 주목합니다
리본이있지요 리본 따라갑니다
우리가 사는곳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보려면
나무를 보라했지요
고려궁지 바로앞에있는 고목입니다
680년 되었다 쓰여있읍니다
이곳 우리가 생각한 역사를 모두 보고 큰 나무인듯합니다
그리고 나들길은 주택가를 통과합니다
지난번 5년전 왔을때보단 골목길이 잘 정비되었지요
발전하는 강화를 보는듯합니다
그리고 보이는곳은 강화향교입니다
강화향교는 1127년(고려 인종 5) 고려산(高麗山) 남쪽 기슭에 창건되었다.
몽고군의 침입으로 여러곳을 이전하였으나.
1624년(인조 2)에 이곳 송악산(松岳山) 옆에 복원하였다.
아참 송악산 개성에있는 산이 송악산이지요
고려가 천도하고 고려궁을 세우면서
그뒷산을 개셩의 송악산과 같은 이름을 사용했답니다
현재는 교육기관의 기능은 상실되었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여
문화재 보관 형식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답니다
강화여고를 지나면서 잠시 길을 잃었답니다
하지만 걱정이 없어요
저기 숲사이로 보이는 붉은색이정표 저기로만 가면 됩니다
그곳에서 본길입니다
왼쪽 강화여고 기숙사가 있지요 이길로 올라와야하는데
어쩌겠어요
로마로만 가면되지요
갈림길입니다
이곳은 15코스와 일부구간이 중복되지요
북문까지 가는길
평온하고 바닥은 쿠션이있구요
정말 걷기 좋은길이지요
중간에 진달래가 이롷게 여인을 유혹합니다
인증한번해야지요
다시 행복한 발걸음을 옮깁니다
북문을향해서
11:55
북문입니다
북문은 강화산성의 북쪽에있는 문입니다
강화산성은 고려가 궁궐을 지을때 개성의 궁궐과 같이 내성 외성으로 쌓응 성인데
여기는 내성입니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았으나 조선숙종때 돌로 바꾸었다지요
성곽은 지난번 왔을때 한참 복원공사중이었는데
완성된듯하네요
북문전경입니다
현판에는 진송루라 쓰여있구요
입구의 모양이 특이하지요
일반적 대문의 입구는 홍예로되어있는데
홍예도 아니고 장방형도 아닌 특이한 형태입니다
계속가애지요
1코스는 성곽을 따라 오르게 되어있읍니다
문쪽에는 성곽의 지붕을 올렸는데
여기는 없지요?
원래 이런것을 복원한건지?
돈이없어서 안한건지? 궁금해
위에서 바라본 북문 모습입니다
아름답지요?
맨 꼭대기입니다
먼저 오른 사모님이 힘쎈표정을 짖네요
성의 제일높은곳입니다
둔덕이지요
이곳이 북장대가 있던곳이랍니다
지금은 없지만 곳 복원될듯합니다
장대가 있다는건 요충지란 이야기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정면의 넓은 벌판을 지나면 바다지요
그너머는 북녁땅입니다
시야가 좋은곳 이곳에 지휘부가있었다는거지요
우리사모님 이곳을 기념합니다
그리고 갈림길입니다
1코스의 다른이름이지요
심도 역사문화길
여기만인가요 강화전체가 역사문화길이지요
리본따라 이정표따라
1코스 진행합니다
봄이라
꽃들이 보아주길 바랍니다
생강나무입니다
노오란 꽃으로 유혹합니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낙엽길
다리도 푹신하게하지만 눈도 푹신합니다
거기에 계단과 여인이있다면
이렇겠지요
생강나무가 퍼드러지게 피었네요
됐어 됐어
충분해
코에도 꽃이 들어오고 있읍니다
이런 이쁜길은
오읍약수로 이어집니다
시간나면 한번 드셔보세요
정말 좋읍니다
시간나면 한번 드셔보세요
그리고 부지런히
벋어납니다
지금이 봄이야? 가을이야?
강화는 역사만큼이나 계절도 보관을 잘하는것 같읍니다
가는길이 너무 이뻐서
잠시 사랑을 고백합니다
아이참! 맨날하는 고백을 ~~~
동네로 들어섰네요
강아지 형제가 사람이 그리웠나 보네요
좋아 죽습니다
도로 건너고
언덕넘어 1코스가 이어집니다
신구라할까요
모두 태양을 향한 모습이지요
태양바라기
모아야하고 가려야하고
형제 같읍니다
마을길지나고 다시 산으로 올랐답니다
그길
양지녁에는 진달래가 퍼드러지게 피어있읍니다
전체는 아니지만요
내눈을 자극하기는 충분합니다
그길에서 홀로 나를 찍어봅니다
그리고 길을 앞서가는 저분도요
이길에서 놀란 고란이도 보았구요
미사일처럼 날아가는 장끼도 보았답니다
강화는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있다
아까 지나온 북문은 내성이고 이곳은 외성이다
강화외성의 출입문인 6개의 문루(안해루, 공조루, 참경루, 진해루, 북파루, 조해루) 중에서 광성보의 안해루,
덕진진의 공조루, 용진진의 참경루는 복원을 마쳤고, 월곳진의 조해루가 2011년에 복원되었고
아직 갑곶진의 진해루와 북파루는 복원되지 않는 상태이다.
조해루(潮海樓)는 숙종 5년(1679)에 지어져 강화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검문하는 검문소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복원된 조해루는 월곶돈대와 연결되고 남쪽의 외성과는 연결할 수 없는 상태이다.
홍예식 성문을 만들고 그 위에 누각을 지은 전형적인 성문 건축물이다
월곳돈대이다
비석 뒤의 월곶돈대는 외적의 침입이나 척후활동을 사전에 방어하고 관찰할 목적으로
해안지역에 돌로 쌓은 소규모 방어시설물이다.
특히 월곶돈대는 강화도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검색을 하므로써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돈대였답니다
조해루에서 월곳돈대로 공터에 ‘莊武公黃衡將軍宅址碑’ 라고 쓰인 비 하나가 서 있다.
사각형의 난간으로 두르고 비를 보호하고 있다.
황형(1459~1520)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아었단다
비가 세워진 이곳은 삼포왜란 당시 왜적을 무찌르고,
1512년 함경도 지방 야인(野人)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국가에 공로가 많은 황형(黃衡)에게 조정에서 땅을 하사하였다고 알리는 비이다.
또한 한강이나 임진강을 따라 거슬로 올라가는 세곡선이나 상선이 나루나 포구에서 조류를 기다리는데,
주로 김포의 강령포, 조강포, 마근포 등을 많이 이용하였고,
월곶돈대 앞은 서해에서 들어오는 배가 닻을 내리고 조류를 기다렸던 곳이었다.
타원형에 가까운 돈대는 홍예문을 두었으며 조강과 염하,
서해를 조망하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관방시설이다.
네모진 돌을 다듬어 성벽을 쌓고 위에는 여장을 설치하고 한 개의 총안을 두었다.
바다쪽으로 3곳에 포를 쏠 수 있는 포구(砲口)를 내었다.
홍예를 통하여본 돈대 내부입니다
이돈대의 상징인 멋진 정자 연미정이 보이지요
돈대의 가장 높은 위치에는 ‘연미정’이라는 정자 한 채가 있다.
정자 뒤에는 500살이 넘는 느티나무가 2 그루가 자라고, 건물 기단 옆에는 석비가 한 기 있다.
이 정자는 최초 건립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시대에 지어졌다고 하며,
1244년(고종 31)에 시랑 이종주(李宗胄)에게 명하여 구재생도(九齋生徒)를 이곳에 모아놓고
하과(夏課 : 여름철에 50일 동안 절에 들어가 공부하던 일)를 시켜 55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때 전라좌도방어사로 큰 공을 세운
황형(黃衡)에게 이 정자를 하사하였으며,
연미정 기단석 좌측에 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는 ‘莊武公黃衡將軍宅址’라고 쓰여 있다.
현재도 황씨문중의 소유로 되어 있다.
그연미정을 기념으로
혼자
그리고 같이입니다
그리고 장소를 옮겨서
한장더 남기고요
홍예에 서있는 여인을 그려봅니다
다시 연미정입니다
500년된 느티나무와
그 만큼 보다 더된 건물이 참 조화스럽습니다
그곳에서 바라본 외부입니다
바다이지요
한강물이 이리로 내려오지요
민물때는 바닷물이 한강으로가구요
썰물때는 한강믈이 바다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저멀리는 분단의 땅 북한입니다
500년된 느티나무를 바가에 넣어봅니다
바다와 강사이의 섬 유도가 보이지요
오른쪽은 바다이구요
왼쪽은 한강입니다
두물줄기가 제비꼬리를 닮았다는거지요
참 이곳에오시면 식사는 이곳에서 하세요
여니정에서 해병대 아저씨들이있는쪽으로 아래 사진 방향입니다
그왼쪽에 가건물 같은 집이있답니다
이집입니다
할머니식당인데요
이집은 주문하면 새로밥을 해줍니다
그래서 오자마자 주문하고 연미정 구경하고 다시오시면
밥이준비되어있읍니다
이런 스타일입니다
김치찌개 조기조림
그리고 밑반찬입니다
바로한밥에
숭늉까지
앞에 할머니가 주인이십니다
한번 맛보러 가 보세요
후회 안할겁니다
연미정에서 염하 옆 도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우측 '옥계방죽' 으로 들어선다.
개펄과 드넓은 농경지를 가르는 뚝방 길이다
왼쪽은 바다이고
오른쪽은 논입니다
도로옆이 수로인데요
이수로때문에 죽방이 되었나 봅니다
바다는 철조망으로 막혀있지요?
역시 북한과 접해있어서요
그냥 이길로 무작정 가면 됩니다
아무생각도 마세요
그리고 한참 가다가 왼쪽입니다
철조망이있구요
조형물도있지요
간판그대로입니다
아주 적막한 도로에
공원입니다
여기를 지키는 군인도 밀납인형입니다
다시 똑같은 길이지요
이제 보이는 것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강화대교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다리가 없었지요
버스를 배가 싣고 건너고 했었지요
고려 고종(高宗)이 원(元)나라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로 피란할 때
이곳이 갑옷만 벗어 쌓아 놓아도 건널 수 있을 만큼 얕다고 하여서
갑곶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고합니다
그 다리 밑으로 통과하면 '갑곶성지' 다. 대원군 집권시절인 1868년 병인박해,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 때 천주교도들이 순교한 곳이랍니다.
성지에 들어서면 일단 이런 넓은 공터가 나타나지요
그리고 직진하면
각종 종교 조형물이 나타나고
언덕을 오르면
저절로 기도가 생각나는 십자가의 길이있고
여러가지 십자가를 만들어놓은
십자가 체험이있읍니다
꽤 무겁네요
그리고 다시 계단을 오르면
이분들때문에 이곳이 성지가 되었다지요
초하나 올립니다
영면하십시요
한쪽구석에 노오랐게 핀꽃은
영춘화이지요
봄에 피는꽃 개나리보다 먼저 피는꽃
그래서 개나리로 많이 착각하는 꽃입니다
다른 구석입니다
예수님과 마주보며 기도도합니다
진지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읍니다
갑곶 기념성당입니다
멋진 건물이네요
길이 길이 간직되길 바랍니다
1코스 마무리 기념사진입니다
머리위에 나들길 리본 집어넣고
둘이 찍었읍니다
힘들었지? 서로 격려하며 마무리합니다
날이 좀 춥지요 빨리 집으로 가야겠네요
1코스 출국도장 받는곳입니다
그리고 2코스 시작점이기도하지요
버스타고 터미널까지 가야하는데요
버스 기다리다 택시가와서 택시로 마무리합니다
이제 강화 나들길도 생긴지가 좀 되니까
길에 질이 낳었요
헤메지 않고 잘다녀왔답니다
1코스 역사도있구요 봄의 냄새도 물신 묻어있지요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1코스 시작했으니 끝내야겠지요
서두르지 않을겁니다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