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아산(白鵝山, 810m)
해방 후 약 1년 동안 공산당이 합법화 이었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리고 남로당이 해체되고 그 공산당이 산으로 들어 가 빨지산이 되었다
이곳 백아산은 무등산과 지리산을 잇는 요충지라 이들이 산에서 은거하는 곳이되었고
한국 전쟁 중에는 조선 인민 유격대가 진지를 세우고 병기공장을 지어 대항했고
전쟁후에도 다시 국군, 경찰과 치열하게 대치 되었던 곳이랍니다.
그 과정에 피아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지요
백아산은 석회암성 백색바위가 거위를 닮았다고 백아산인데요
희색 바위가 빨갖게 물 들었을 그런 치열한 산이었답니다
그 빨지산 유격대가 천연 초소격으로 이용했던 마당바위 등 백아산 일대는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무대이기도 합니다
오늘 산행 기록인 트랙을 정리하다가 날려버렸네요
할수없이 동네에 돌아다니던 지도를 첨부합니다
원리마을에서 시작해서 하늘다리 마당바위 그리고 정상
그리고 다시 하늘다리까지 오다가 못미쳐서 왼쪽으로 관광농원까지 산행합니다
약 7.5Km 3시간 40분 소요했지요
버스가 멈추고 하산 명령입니다
화순이 멀기는 멀지요
도착시간이 11시가 다되었습니다
서울서 4시간은 달려 왔나 봅니다
그래도 오늘 안으로 서울 가겠지요
4시간 산행을 명 받았답니다
지금 바깥 온도는 5.5도입니다
조금은 추운 듯하네요
백아산 주변에는 옛 지명 그대로 전해지는 마을들이 많다네요.
지도엔 전부 한자말로 적혀있지만 마을 사람들은 옛말 그대로 부른답니다.
물골-수리(水里), 새목-조항(鳥項), 웃새목-상조항(上鳥項)
곰실-웅곡(熊谷), 갈갱이-노치(蘆峙), 솔티재-송치(松峙), 원골-원리(院里)
이름에서 조금 저항의 느낌이 드는 것은 선입견 일까요?
이곳도 원리라 되어있지만 원골이 맞는 말입니다
버스하차 바로 앞
이곳은 원리 사거리입니다
아! 눈에 보이는 현수막에
농민수당이란 것이 있네요
이런 것이 다른 지역에도 있는 것 인가요?
우리나라 살기 좋은 농촌입니다
산행을 시직하기전에
오늘 특별히 새로 빨지산에 가입하신 분입니다
그 중심 원리마을의 상징인 떡방아간 앞에서 오늘 산행 기념 합니다
요즘 보기 힘든 모습이지요
고드름이요
도통 아파트뿐인 서울에서는 거진 사라진 모습입니다
예전에 많이 보았던 풍경인데 정겹네요
고드름을 뒤로하고
마을 길을 통과합니다
등산로 입구에 모여서 오늘 단체 사진을 찍는데
여기 지역이 지역인지라 빨지산이 생각납니다
이들의 역활을 빨지산으로 해야하나요?
진압군으로 해야하나요?
엄청 나신 분들이라 어떤 역을 주어도 잘하실 것 같습니다
유격 특공대 이지요
일단은 이정표를 보고
하늘 다리를 목표로 출발합니다
반달 가슴곰 ?
산에 대한 정보 없이 왔기 때문에
지리산이 가까 울 것이라 생각 못했는데
양쪽 산을 넘나드는 빨지산 역활은 반달 가슴곰이 하겠네요
조금 올라서니 왼쪽 언덕 위에
커다란 바위 밑에 구멍이 보입니다
혹시 무슨유적지?
한번 올라가 봅니다
바위굴입니다
충분히 그들이 은신처로 사용했을 만한 곳입니다
몇명이 이슬피하며 잠잘만한 충분한 공간입니다
그냥 그정도만 생각해야지요
경사가 급한곳을 지나고 길이 좋지요
눈은 이정도이고요
길도 좋구요
특히 소나무가 참 많이있네요
다시 한 고개를 넘어서니
이정표가있구요
조금 덥다고 생각되는분들 한꺼플 벗고 갑니다
그리고는 계속된 오르막입니다
빨지산의 본거지 군경을 피해서 자기들 세력을 유지하려면
이정도는 험해야 되겠다 생각됩니다
멀리 봉우리가 보입니다
아마 하늘다리 정도 되지 않을까하네요
이제 처음으로 시야가 뚫렸답니다
작은 산들을 몇개 넘어 큰산이 그림자 처럼 보이지요
지도로 보니 지리산 만복대 인듯합니다
그리고 다시 평탄한길
우리 일행이 지나간 발자국이 보입니다
개들은 소변에 모든 정보가 있다지요
암수 구분, 건강상태, 먹은 음식등이요
우리는 지나간 발자국을 보고 정보를 얻습니다
그들도 그랬겠지요
그 일행들이 멈춰 있네요
이정표 때문입니다
이길은 관광목장에서 올라오는길이지요
아마 총대장님은 이리로 올라오고 계시는 중일겁니다
지금 바로 들은 정보인데요 우리도 하산을 이리로 한다네요
자연휴양림이 코로나로인하여 출입금지라나?
정상 갔다가 관광농원으로 내려오면 버스가 있답니다
상여바위?
다른 사람 산행기를 보면 상여바위, 각시바위,등 보기 좋은 바위가 많다고 했는데
예습을 안해서 그냥 모르고 오르고 있네요
그래서 혹시 상여바위 안닌가요?
오늘 조망은 좋지 않습니다
그래도 요만큼은 볼수 있지요
하산중이신 지역분들이지요
제가 백제 사람이냐 물었는데요
많이 당황하시네요
우린 고구려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이제내리막길 입니다
여지껏 아이젠을 하지않던분들 위협을 느끼셨는지 멈추어 계십니다
아 눈대비 무장을 하고 계시지요
저요? 그냥 갑니다 왜? 귀찬아서요
이제 내려갔다가 올라가면
하늘다리가 나오나 봅니다
역시 눈길 산행은 내려갈때가 힘들지요
조심조심 내려 갑니다
다시 커다란 바위 사이길로 올라갑니다
딱 보아도 멋지다 생각했는데
이런 바위 옆을 통해서 하늘다리로 갑니다
오른쪽에 바위굴이 보이지요
이곳도 빨지산은 숙소로 사용했을 것 같지요
어느 편일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혹은 기꺼이, 산으로 들어갔던 주민들.
먼저 산속으로 들어간 남편을 따라서
가장을 따라 산에 올랐던 남은 가족들.
그들은 남북의 사상전 소용돌이에 휘말려 죄없이 죽어갔다.
지리산을 떠돌며 병들거나 굶어 죽고, 총맞아 죽고, 얼어 죽었다.
마지막 빨지산 여인도 그런 산골마을의 평범한 새색씨였다.
사상과 이념을 떠나서 한번 되새겨 본다.
절터바위(722M)입니다
이름으로 보아선 옛날에 이곳에 절이있었다는 말인데요
누가 이 높은산 정상에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을까 합니다
지금 이여인이 서있는 이곳은 바위 절벽입니다
좀 더 멀리서 조망합니다
절벽이 굉장하지요
저 겁없는 사람들
이곳 절터 바위와 건너편 마당바위를 연결하는 다리가 있습니다
빨지산과 군경의 무고한 희생자들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만들었다지요
그래서 그이름은 하늘다리랍니다
그리고 하늘다리 전경입니다
저 건너가 그 유명한 마당바위입니다
그때 이다리가 있었다면 좀 더 수월하였겠지요
삶이
그런 바람에 이 다리가 만들어 지지 않았을까요
그 절터바위 절벽 아래 모습입니다
역시 산넘어 산입니다
방향으로 보아서 모후산이있어야한데 구름이 안도와주지요
그리고 70여년전
겨울 여기서 추위를 참아가며
이곳을 사수했던 사람들......
도데체 무엇을 위하여 이었을까요?
다리를 건너기전에 우리는 다리의 뜻을 되세겨 봅니다
그리고 잠시 빨지산이 되 봅니다
진지하고, 비장한 모습으로
그리길지않은 다리
총길이 66M 폭 1.2M 그리 넓지 않은 다리입니다
이 다리만 있었어도
오늘 따라 바람이 엄청납니다
옆에 줄이 없다면 무서워서 갈 수도 없습니다
내려다보이는 협곡입니다
바람이 쳐올라오고 있지요
공포스럽게
유리창을 만들어 놓았네요
그때를 느껴 보라는 의미 일까요?
평온해보이나요?
절대로 평온하지않습니다
70년저 그바람이 지금 아래에서 막 올라오고있답니다
이제 다리를 다 건너서
절터바위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때로는 포기할 줄도 알아야합니다
이분은 항복하고 오는 현대판 빨찌산입니다
이게 정말 현명한것이지요
웃으면서 항복합니다
그에 비하면
절대로 항복 할 것 같지 않은 분도 계시지요
끝까지 죽음으로 항명하겠다는 각오가 얼굴에 있습니다
하늘다리 지나면 마당바위로 가는 천국의 계단이고 계단을 오르면 마당바위입니다.
한많은 마당바위입니다
마당바위는 넓은 공터로 조망이 뛰어나 빨지산 지휘자는 이곳에서 빨찌산을
지휘 했다고 하며 표지석(756m),헬기장,박씨묘,철쭉 조망바위등 조망권이
뛰어난 곳으로 산 전체가 다 보입니다
마당바위에서 가장먼저 눈에띠는것은 무덤입니다
밀양 박씨 묘라고 되어있지요
누가 이 높은 곳에 묘를 썼을까?
그런데 여기서 많은 사람이 그랬다 생각하니.....
그냥 그분들중에 .... 생각합니다
1948년10월 여순반란사건 이후 국군15연대 3대대를 주둔 시키고 빨치산소탕을 시작,
입산자 가족을 아산국민학교에서 약50명을 처형한다
1950년 6.25이후 전체면민 2000세대 70%인 1400여세대가 이주 하였으나
1950년10~1951년 4월까지 빨치산과 국군 쌍방에 의해 주민 1000여명이 희생 된것으로 추정된다
백아산은 백운산 지리산과 함께 빨치산 최강부대인 전남빨치산의 본거지로 그들에게는 3대 성지였다고 한다
지리적으로도 광주, 전남의 중심지이고 산세도 사방팔방 이어져 유격활동의 최적지 였다고...
1951년 백아산의 빨치산 본거지인 마당바위가 위협을 받자 도당지휘부가 노치리 갈갱이 마을로
전남유격대총사령부는 노치마을로 옮겨 문바위에서 보름재와 차일봉에 이르는 토산능선,
곡성매봉과 화순매봉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한다.
51년 여름 백아산 토벌작전에는 군경합동, 광주 미고문단 협조로
미국 전폭기 까지 동원 대다수를 섬멸한다.
오지에 있지만 이곳은 위치상 광주와 전남의 중심지로 산세가 험하여 빨치산 본거지로서
유격활동의 최적지로 알려졌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주무대가 바로 이곳 마당바위이다.
그 것을 알고 나면
그때 희생 되신 분들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사상때문에? 생계 때문? 아니면 어떤 줄에 이끌려
깊은 생각에 잠겨봅니다
사실 모르고 갔었던 곳이다
그때는 고작 이름이 바위인데 땅이잔어?
100여명이 주둔했다는데 사람들 여기서 훈련도하고 잠도자고
땅으로 평평하게 했겠지요
나무사이로 백아산 정상이 보입니다
그런데 거위는 없지요
마당바위에서 내려섰습니다
이길로가도 관광농원이 나온다네요
정상 후 이곳으로 하산하렵니다
천불봉?
오늘 모든 바위는 상상입니다
확인해주시는분이 없네요
능선능선 사이 뾰족 바위가 있습니다
딱보는순간 옛날 어머님들 아들 나아달라고 무지무지 빌었던 바위가 아닐까 합니다
이제 내려서서 바라본
하늘다리 전경입니다
오름ㄴ쪽 부쳐바위 왼쪽 마당바위
다리없는 저골짜기를 수없이 많이 사람들이 들락거렸을 겁니다
결국은 살려고가 아니었을까요?
뒤로 철쭉 나무가 배경이되고
제단이 있네요
철쭉제를 지내는 곳인가요?
그러기도 하겠지만
이산에서 돌아가신 모든분들의 위령제도 지낸다네요
오늘 제물로 대장님이 올라가셨네요
대장님 희생으로
부디부디 평화를 주세요
어제의 용사 빨지산입니다
하늘다리 배경으로 사진 하나 남깁니다
하늘다리가 보이는 이곳에서
점심을 단체로 해결합니다
이제 다시 정상을 향합니다
줄지어서 다시 빨지산이 되는겁니다
정상을 향하여
각자 임무를 위하여
조를 짜서 정상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리고 어느방향에서 보아도 불상을 닮았다지요
천불봉을 지나고
시야를 멀리 돌려봅니다
멀리 보이는 산이 무등산?
아니면 말고요
식별이 잘안되네요
잠시 오던길 뒤로 하늘다리를 바라보고
정상을 향합니다
갑자기 조릿대길이 나타나고요
잠시 언덕을 올라다 보면
하늘이 뚫리면서
정상에 올랐답니다
오늘 주인공 빨지산입니다
정상등정을 축하합니다
오늘 살아남으셨네요
그리고 또하나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정상석도 인증하고
하산해야지요
하산합니다
하산은
하늘다리 가가전 관광목장길로 가는 삼거리로 하산합니다
이길은 별로 특징이 없습니다
멀리 하늘 다리가 보이는 정도입니다
그져 속도를 내고 내려가는것 뿐입니다
눈의 농도가 약해지므로
아이젠도 탈착하고
무서운 속도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삼거리
하늘다리 넘어서 내려오면 이곳과 만나나 봅니다
금실이 영원하라?
뭔말?이 바위에?
바로 옆나무가 연리목이라네요
어째서 연리목이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내눈에는 한나무 같은데요
상당히 유명한가 봅니다
관광목장 전경입니다
어느 돈 많은 음식집이지요
그 관광농원 구석 조형물입니다
빨지산이고 뭐고요
나! 장가좀 보내주세요!
정말 급한건 장가가는 겁니다
인구도 절벽이라는데요
백아산 산행을 마치면서
삶과 죽음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어떤이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사하고 화려한 사람으로 남아 있고
어떤이는 뭔지 알수 없는 줄에 이끌려 점점더 그속에 수렁에 빠져들 듯
멀쩡한 집떠나 깊은 산속에서 비바람에 맞으며
생과 사를 넘나들며 그런 생활을 하고
때로는 죽음으로 마치는 ....
백아산 이름이 이뻐서 그냥 거위만 생각했는데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