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풍수지리에서 많이 들었지요
풍수이론에서는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전주작(前朱雀), 후현무(後玄武) 등 네 종류의 산을 말합니다.
조선 건국과 한양성을 만들면서도 풍수이론이 적용되었답니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측의 산을 인왕산으로 우측의산을 낙산으로 전면은 남산으로 후면은 백악산으로 정했다지요
그 중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이 인왕산입니다
인왕산은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西山)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답니다.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그렇게 개칭하였다고 합니다.
오늘의 역사문화탐방은 무악재역 1번출구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탑바위가 있는 청련사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약수터가 있는 체육시설 장소인 흥인사지로갔다가
미륵불 용화전이 유명한 이쁜절 환희사로 갑니다
그리고 인왕산 정상 부분이지요 기차바위를 거쳐서
백련봉, 낙월봉을 그리고 인왕산 정상인 상봉을 인증합니다
그리고 오던길로 되돌아 오다가 잠시 비탐방길로 들어서서
전면의 치마바위를 감상하고
커다란 바위에 음각으로 조각된 마애불을 감상하고
석굴암과 기도처인 천향암까지 답사를 하고
수성동계곡을 거쳐서 옥인동에서 마무리합니다
오늘은 블랙야크 역사문화 탐방 인왕산 편입니다
최근 코르나 2.5단계로 인하여 모든 것이 위축되어 있지요
그래서 당초 계획된 버스 탐방을 포기하고,
규모도 축소하고 이곳 인왕산에서 진행합니다
시작은 뒤로 안산 정상이 보이는 무악재역 1번출구에서 시작합니다
6년? 7년? 하여간 오랫동안 역사문화탐방을 진행하고 계신분이지요
우리는 이분을 특히 여자만 좋아하시지요
그 정도가 종교 수준이라서 우리는 이분을 전교주라 부른답니다
해가 갈수록 내공이 쌓이는지 진짜 교주가 되어 가는 듯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조건 믿음이 강해지고 있답니다
믿사옵니다 교주님!
그런 교주도 때로는 눈치도 보아야 합니다
종현교에 경제적 도움을 주는 블랙야크말입니다
그곳의 명령을 따라야 하지요
그 명령은 정부 시책에 부흥하기를 원했지요
체온 측정을 실시합니다
사진도 찍어야지요
순전히 보여 주기 위한 행위 입니다
오프닝입니다
역시 2m 거리 두기로 인도합니다
모두들 마스크도 착용하였구요
광신도들 답게 말씀도 잘도 듣고있지요
시작은 이곳 무악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곳은 조선 국립 여관인 홍재원이 있던 곳이랍니다
홍제원은 중국 사신이 오면 도성에 들어 오기 전에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의관도 갖추고 입경하는 곳이었다지요
그 홍제원 때문에 홍제동도 있고 홍제천도 있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무악재는
이곳에서 본 북한산은 인수봉이 마치 아이가 뛰쳐 나가려는 모양새라네요,
그리고 이 고개의 서쪽에 있는 산(오늘날의 안산)을 ‘모악(母岳·어미산)’이라 이름하며
엄마인 안산이 아이(인수봉)를 달래려 했고
이에 따라 고개도 ‘모악재’로 불리다 ‘무악재’가 됐다고들 합니다.
또 하나는 조선조 초기 무학대사가 도읍 터를 물색 하고자 이 고개를 넘나들어 ‘무학재’가 됐다는 설도 있고
이곳에 호랑이가 출몰하여 사람들을 모아서 고개를 넘었다 하여 모아재가 되었다가 무악재로 변했 다 합니다.
모래재, 길마재, 모화현…부르는 이름도 다양했지만 근세에 와서는 ‘무악재’로 정 착 됐답니다
기본적인 강의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역사탐방에 들어갑니다
무악재 아파트단지 숲을 지나고
이제 인왕산의 품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첫번째 만나는 곳이 청련사입니다
이곳은 절과 무당집의 중간 정도되는 아주 작은 사찰입니다
이곳은 대웅전보다 탑바위가 더 신령스러운 곳이랍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 가다가 오른쪽으로 올라갑니다
여기서 잠깐
오늘 참가자중 가장 년소자이지요
청련사 석등앞에서 자기의 존재감을 남겨주네요
인왕산은 바위토템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랍니다
불교 이전에도 이 바위에는 촛불을 켜놓고 아들을 구원하는 기도가 빈번했다지요
그 자리를 불교에서 탑을 세워 놓고 불교로 유도 했다합니다
어째든 청련사 탑바위는 아들 구원의 효험을 잔뜩 가지고 있는 바위랍니다
그 바위에 잠시 불륜이 보입니다
아들보다는 젊음의 기를 요구하는 아주머니이지요?
정말 기뻐서 어쩔 쭐 모르네요
이런!
이에는 이 귀에는 귀입니다
거기에 대항하는 남편의 반발입니다
그렇게 한바탕 웃어 보고요
잠시 또 다른 이벤트가 이루어 지고 있읍니다
이해는 안되는데요
만난지 21주년 되는 날이랍니다
정말 기억 할 것도 많은 현대에서
대단한 부부인 듯합니다
그 기념으로 반지 선물까지요
아니 케익까지 준비했네요
자기네 집안 행사를 여러사람들 앞에서
아이디어가 좋지요
이런 모습을 보니 옛날에 태어난 우리가 정말 다행이라 생각됩니다
그것이 부러웠던 것인지?
전혀 관여치 않고
이래 뜰에서 알지도 못하는 풀과 대화를 나누는 분도 계십니다
절대로 부러우면 지는겁니다
여기 또있읍니다
만난지 21주년이고 뭐고 난 먹고 사는게 더문제여!
세상일 배부른게 최고지 뭐!
이거 훔쳐 먹는 것 아녀, 까치밥이여
정말 맛있게도 먹네요
아구배 나무의 지금막 핀 꽃들과 인사하고 청련사 탑바위를 끝냈지요
당나무(神木)입니다
무(巫)에서 신목은 하늘과 땅,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거룩한 곳이므로
우주의 중심으로 여겨지고 우주목(宇宙木)의 의미를 가진답니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환웅(桓雄)은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나무 신단수(神壇樹) 밑에 강림하였다 하니,
신목 신앙이 한민족의 태초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지요.
신목에 대한 신앙은 산악신앙 및 천신강림(天神降臨) 신앙과 연결되어 있어서
고조선 이래 신목에 대한 신앙은 무와 더불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내려온답니다.
이들 신목을 위하여 매년 봄이나 가을에 정기적으로 마을굿이 행하여진다.
이들 부부 아까 불륜에 대한 서로의 용서를 신목 앞에서 빌고 계시네요
체육시설이 보이지요
그러면 약수터가 있어야하는데요
네 약수터가 있습니다
이곳은 약수물이 있고 약수를 먹으러 오시는 분들이 새벽 운동하는 곳
그냥 그렇게만 생각했는데요
흥인약수랍니다
왜?흥인?
동대문의 흥인지문일까?
아닙니다
이곳은 예전에 흥인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 랍니다
샘이 있는 곳 이곳은 요사체가 있던 곳이구요
바위 밑에 눈섭이 지붕이되고
자연스런 집이 된 이곳은 흥인사의 감실 이었다지요
감실은 부처님을 모셨던 자리랍니다
지금은 체육시설 보관 장소로 쓰이고 있나 봅니다
신기가 있어 보이기는 합니다
높이도 재보고
바람도 느껴보고
예전에 부처님이 계셨던 상상을 해봅니다
그 감실 윗부분이지요
이곳에도 벌레먹은 바위가 있지요
이런 요상한 바위가 이곳을 더욱 신비스런 기도처로 지목 받는곳이겠지요
흥인사는 꽤 큰절이었나 봅니다
계단을 잠깐 오르니 또다른 감실이있지요
정말 자연스럽게 부처님을 모실수 있는자리입나다
그 왼쪽으로는 산왕대신이란 비가 있읍니다
산왕대신이란 대개 절이 있는 큰 산을 지키는 신장(神將)을 말합니다.
그러나 무교에서는 산왕대신은 팔도 명산의 산신령으로 무속 신앙의 가장 중심적인 신령입니다.
이곳도 불교이전에 이미 무속신앙이 먼저 점령했던 곳이란 이야기입니다
그 자리를 흥인사가 들어오면서 불교에 인수하게 된거이겠지요
불교가 들어오면서 힘쎄게보인는 갓을 쓴 부처님을 세워 놓았겠지요
다른 부처님 처럼 근엄해 보이지는 않지만 힘이 강해 보입니다
힘으로 눌러 보려는 의도가 아니였을까요
지금도 여기서 기도들을 많이 하나봅니다
거기서 기도하고 소원을 빌었다면
바위에 이름을 쓰는 것이라네요
옛날에는 돌을 파서 새겼는데
지금은 이렇게 붓으로 쓰고 도망갔나 봅니다
이제 전경을 바라보고
산신각으로 향합니다
산신각으로가는 계단입니다
상당히 가파르고 길지요
흥인사가 적지 않았던 사찰인가봅니다
다 올라서니
절터에 돌이 하나 올려져있읍니다
예전에 산신각이있던 자리일것입니다
아무 표시도 없지요
하지만 작은돌에서 뭔가 신비스럼이 나오는지
작은 돈이지만 돈이 모여있네요
오셨던 분들 그나마 그냥 갈수 없었나봅니다
높은곳
높은곳은 전망이 좋겠지요
이곳은 안산이 정면으,로 보입니다
그 것으로 경치는 충분합니다
그리고 더 멀리도 조망이 되지요
서울의 서쪽지역이 멀리까지
이곳 조망이 됩니다
이곳 인왕산은 2번의 통제가 있었답니다
연산군시절 궁내에서 흥청거리는 것을 외부 사람들이 볼수 없도록 인왕산을 입산금지 시켰고
1967년 124군부대가 청와대로 진격하고 난 후
이 곳은 군인들이 점령했다네요
그래서 그당시 사찰들이 많이 없어 졌답니다
그중 하나가 이곳 흥인사였다네요
하지만 아직도 자연은 흥인사를 지키고 있답니다
원래 집을 등에이고 다니는 달팽이인데요
이렇게 집 없이 흥인사에 머물고 있지요
다시 나무속으로 바라 보이는 안산을 바라 보며
다음 목적지인 환희사로 갑니다
환희사는 작은 비구니 사찰이랍니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이쁘게 장식 되어있읍니다
가람배치도 그렇고 주변의 장식도 그렇고 곳곳에 꾸며논 화단도 이쁜 꽃들로 장식되어있네요
그래도 주요건물은 부처님을 모신 건물이지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과 미륵불을 모신 용화전이 나란히 있습니다
이쁜절인 만큼 창틀 문뉘도 이쁘게 만들었지요
환희사는 사실 용화전을 보러 왔읍니다
미륵불을 모신 불당을 미륵전 또는 용화전이라 하지요
그런데 이곳은 용화전이라 하네요
용화전 내부입니다
판석부조불입상이라는 어려운 이름으로 불리우는 미륵불입니다
요즙은 간단하 석불입상이라 불리운다지요
형태나 마모상태로보아서 고려때 축조된것으로 사료되지만
어찌해서 여기에 있는것인지는 알수 없답니다
인사동에서 사왔나요?
오른쪽 또하나의 불상이있지요
어느 기록을 보면 나한이라 쓰여 있는데
자세히보면 지리산 마고함멈과 비슷하다는 생각입니다
아마 여기저기 수집하여 가져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찰 한구석에 놓여있는 조각작품입니다
이역시 같은 관점에서 갔다논 작품이 아닐까요?
이제 환희사 탐방을 마치고요
계곡으로 들어갑니다
인왕산이 바위토템의 메카답게
여기저기가 기도처입니다
바위에 구멍이 많고
촛불로 그을러 씨꺼머게 되었다면 무조건 기도처입니다
구석구석이 사람들이 은거할수있는 바위동굴이있지요
어떤 곳은 들어가지 말라고 철망을 치어 놓았네요
여기도 있네요
이번에는 옥동약수입니다
옥동약수터에 이르면 약수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기를 하고 싶은데
부적합이랍니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보고는 먹지 못하겠네요
손만 축이지요 무지 시원합니다
원래는 바위쪽 석간수 였는데 막아놓고 이렇게 현대식 수도로 변모했네요
이 약수터 역시 예전에는 절터였음이 분명합니다.
곳곳에 축대 혹은 산신신앙의 흔적들이 역력히 남아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기도 해야지요
아니 벌써 밥먹을 시간입니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각자 싸 가지고 온 음식을 나누어 먹었답니다
그리고 기차바위를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올라갈수록 시야가 터지지요
저 멀리 북한산 보현봉과 문수봉이 보입니다
두분은 보살계의 라이벌이시지요
라이벌 답게 북한산에서도 서로 마주보며 위용을 뽐 내고있답니다
왼쪽으로 사모바위 비봉도 선명하지요
사진본능
안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계시지요
그냥 갈수 없어서 삿다를 눌러봅니다
이제는 기치바위입니다
양쪽으로 철제 난간을 잘 설치해 놓아 안전한 길입니다.
난간이 없다면 무섭겠지요
이곳은 인왕산 전체를 통털어 가장 멋진 전망의 파노라마를 선사해주는 곳입니다.
특히 왼편의 백악(북악산)과 그 아래 청와대 그리고 그 너머 서울의 고층건물들을
발 아래로 내려다보는 맛이 일품입니다.
시야가 트이면 기분이 업되지요
작두를 탄다나?
난간을 작두 삼아 무당이 되겠다는분이 계십니다
참아야 하느니라~
우리는 전망을 봅니다
북한산이지요
그 아래로 평창동,신영동이 보입니다
오른쪽으로 부암동 그리고 북악산이보이고요
더오른쪽 북악산 아래 청와대도보이고 경복궁도 희미하게 보입니다
위험한데
작난은 이제그만
뒤질수없는 장난 본능 바로 따라합니다
참아야 하느니라~~
겨우 진정시키고
사진으로 보답합니다
표정좋고 배경좋고~
기차바위 그끝은 하얀연꽃이라했나요
백연봉입니다
남산이 지척이지요
그리고 여기는 인왕산 정상이구요
여기는 달이 떨어지는 곳 낙월봉입니다
2곳 모두 가야 할 곳이지요
백련봉의 하이라이트 해골바위입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나왔다지요
모양을 제대로 볼려면 아래에서 쳐다보아야 한답니다
역시 해골처럼 구멍이 숭숭입니다
저구멍에 3번 돌을 던져서 들어가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데
저는 소원이 없나봅니다
들어갔다 나오네요 2번씩이나
내려오는길
또 위험한 바위위에 서계십니다
거기다 날개까지 펴셨네요
훨훨 날아서 서울을 다 가지십시요
성곽으로 올라가는길
낙월봉 바로아래입니다
이 계단을 올라서면
낙월봉이랍니다
서울성이 새롭게 개축되었네요
어서 빨리 낡아져서 제대로 어울렸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지금은 너무 인공적이지요
그리고 낙월봉입니다
떨어지는 달은 볼수 없지만
서울상공위에 떠있는 수많은 코로나가 보이십니까?
빨리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높은곳에서 바라보는 서울 시내모습은
엣날을 생각하게하지요
저기 남산도 광화문 광장도 그리고 경복궁도
모두 옛날 생각을 하게 만들지요? 박사님
드디어 인왕산 정상입니다
사실 정상은 여기가 아니지요
제일높은곳 이곳이 정상인데
저 젊은 연인이 자리를 꽉잡고 상당히 오랜시간을 무표정하게 있네요
비켜달라 할수도 없구요
에이 부침바위 소원이나 빌어야겠네요
자기나이만큼 돌려야한다나
여자분 42번 남자분 25번 돌렸는데 둘다 붙었답니다
그나이 세어 보느라 1분이상 기다렸답니다
이분 기세에 눌렸는지
그 연인이 자리를 떳네요
그를 쫒은 기념으로 이렇게 남겨봅니다
이럴때 꼭 샘내시는분이 계시지요
같이 해드려야지요
최연소 역탐대원이시지요
잠이 좀 왔는지 투정을 하던데
정상 그자리 엄마와 함께하더니
점잔아 졌답니다
이건? 참외 아닌가요?
정상부근 바위밖에 없는데
참외가 꽃을 피웠네요
개똥참외라지요
제발 무럭무럭 자라다오
경복궁을 바라봅니다
놀자놀자 흥청망청 연산군이 보이십니까?
그래서 여기를 못오게 했단 말이지요
정상에서 세르파님들이 모였답니다
기념한번 해야지요
정말 수고 많이하셨어요
얼마나 수고하셨는지
디테일하게 봅니다
아직 마스크를 쓰고 계시네요
대장 세르파이지요
가위가 이겼네요
성곽을 따라 내려가다가
샛길 출입금지가 나오지요
여기로 가야 하나봅니다
양옥집?
정말 산중에 제대로진 집이지요
안으로 들어가니
방도 여러개입니다
많은 사람이 거주했던곳이지요
예측해봅니다
1번 무속인들이 거주하던 기도처
2번 군인들의 숙소
아무거나 상관없지요
산행하다 비만나면 피하기좋은곳입니다
사실 샛길금지 푯말을 무시하고 이리로 온 것은?
치마바위의 전모를 보려고 온것입니다.
연산군을 친위 쿠데타로 몰아냈던 중종반정(1506년) 직후 폐위된 단경왕후가
경복궁 안의 남편(중종)을 그리워하며 매일 자신의 치마를 펼쳐놓았다 하여
‘치마바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연분홍치마였다고 강조를 하시네요
하지만 이런 설명 없이 바라봐도 치마바위는 치마바위이지요.
바위의 모습 자체가 마치 고운 한복을 입은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너울거리며 흘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중반까지 암벽등반의 대상지였다.
현대 한국에서 암벽등반이 대중화되기 전,
그러니까 북한산의 인수봉이나 도봉산의 선인봉 등이 다양한 루트로 개척되기 전,
이곳 인왕산 치마바위는 암벽등반가들의 등용문이자 연습장이었답니다.
그 암벽을 겨냥해서 연습을 하는 신동이있었으니
그이름 하연이라 했나요?
지금 지대로 연습중입니다
그 산악인 바위 하나 통과하고 성취감이 대단하지요
넌 대단한 산악인이 될꺼야!
이제 석굴암으로 향하는 하산길이 각이 잡힌 바위들이 산적해있읍니다
이바위들은 서울성을 만들때 이곳에 바위를 잘라서 만들고 남은 것들이랍니다
예전에 바위를 자를때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바위에 홈이 보이지요
정으로 이렇게 홈을 파서
물푸레나무를 이용한다지요
물푸레나무를 홈에 집어넣고 물을 넣어 부풀리면
부피가 커진다지요
그 커지는 부피의 늘어나는 힘에 의하여 돌이 쪼개진답니다
그 당시로는 정말 대단한 발견이었겠네요
그렇게하여 쪼개진 단면입니다
석굴암을 가는길 오른편 모롱이를 돌아가면 곧 마른 계곡이 나타납니다.
그 계곡을 넘어 다시 한 모롱이를 돌아가면 뜻밖에도 거대한 마애미륵불이 만납니다.
인왕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 마애불 옆에는 ‘미륵존불’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지요.
떡 벌어진 어깨와 뜨게 뜬 눈, 그리고 자신감이 느껴지는 입술선과 턱선 등으로 매우 남성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 어떤 기록도 남겨져 있지 않아 조성시기를 짐작해보기가 쉽지 않지만,
조각기법으로 보아, 아마도 조선 말기에서 20세기 초중반 사이에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강인한 인상의 선각마애불을 ‘인왕산 동미륵’이라 부른답니다.
인왕산 동미륵 옆에는 또 다른 마애산신도가 새겨져 있지요.
이곳의 산신도는 양각(부조)으로 되어 있지요.
안타까운 점은 산신(령)과 동자승들의 얼굴 부분이 많이 훼손되어 시멘으로 복원해 놓았네요
그래도 호랑이만은 그 멋진 꼬리를 하늘로 치켜세운 채 완전한 자태로 남아있지요.
이 산신도 옆에는 ‘산신각’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읍니다.
2개의 마애불 모두 동전이 많이 붙어있지요
아직도 소원을 빌면 잘들어준다는 소문이있는가 봅니다
우리 세르파님도 요즘 고민이 계신지 엄청 간절한 모습이지요?
또다른 분입니다
아까 어느 나이드신분이 자꾸 찍접거려서
문제가 생긴듯하지요
그래서 기도에 열중이십니다
이제 석굴암 가는길입니다
인왕산은 곳곳이 기도처이자
소원바위입니다
그바위에 구멍이 있다면 감실이지요
그작은 감실에 어울리는 작은 부처가 들어있습니다
이번에는 석굴암입니다
석굴암도 볼만 하지만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다름 아닌 산신단입니다.
따로 건물을 지은 것은 아니고 자연석의 바위에 마애산신도를 새긴 곳인데,
어설픈 비닐 가건물로 에워싸고 있었는데 불이났다나? 지금은 철거된 상태입니다.
산신도는 흔하지만 마애산신도는 드물다지요.
게다가 몇 안 남아있는 마애산신도들 중에서도 그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은 더욱 찾기 힘들답니다.
그런 맥락에서 석굴암 산신단에 남아있는 마애산신도는 각별한 존재입니다.
구름 모양의 눈썹을 달고 있는 호랑이의 표정은 익살스럽고,
복숭아를 공양하려 하는 동자승의 표정은 사랑스러우며,
편안한 자세로 앉아 수염을 가다듬고 있는 산신(령)의 표정은 온화합니다.
석굴암은 글자 그대로 바위굴로 이루어진 절이지요.
천연의 바위들로 이루어진 요새와도 같은 곳이었기에 1968년과 1978년에 연달아 자행된
사찰철거작업에서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네요.
새로 조성한 석불 3기를 안치한 본당(대웅전이라 볼 수 있다)도
석굴속 본당 모습입니다
많은곳에 석굴암이 있지요
모두 자연석 속에 불당을 만들어 놓은 곳
비숫한 구조입니다
석굴암을 등지고 섰을 때 왼편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오솔길을 따라가 보면
또 다른 암자(터)를 볼 수 있습니다.
바위에 붉은색 손글씨로 "천향암"이라 쓰여진 곳이 있는데요
건물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오직 바위문화유산들만이 산재해 있지요.
신령한 바위와 샘물,
이것이 우리 민족의 오래된 기도처의 최소요건인데,
현재의 천향암이 바로 그러한듯 합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신앙형태를 소박한 원형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곳이지요.
여기에 세 번째 요건을 꼽는다면 동굴입니다.
신령한 바위-샘물-동굴의 삼박자를 모두 갖춘 곳이 석굴암입니다.
당연히 소원을 빌어야 겠지요
그리고 치마바위를 다시보고
인간 세상을 처다보며
오늘 인왕산 역사 탐방을 마무리합니다
사실 인왕산에서 가장 유명한 것을 하나만 꼽으라면 오늘은 가지 않았지만 당연히 선바위이지요.
한양도성을 축조하기 직전의 일이다.
선바위를 도성 안에 포함시킬 것인가 제외시킬 것인가를 놓고 논쟁이 붙었다합니다.
선바위를 불교의 성지로 인식하던 무학대사는 당연히 포함시키자고 주장했지만.
불교세력을 견제하려던 정도전은 결사반대했지요.
태조 이성계는 묘한 중재안을 내놓았답니다.
“눈이 내린 다음 눈이 녹는 선까지를 도성 안에 포함시키자.”
결과는? 선바위가 있던 곳의 잔설(殘雪)은 끝내 녹지 않아 결국 도성 밖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어째든 그 인왕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수성동계곡입니다
잠시 피곤함을 발벗고 물에 축여봅니다
겸제정선의 그림에 나오는 곳이 이곳이라지요
잘 보세요 그림속의 다리요
그 다리가 이 다리 랍니다
옛날 모습과 지금 모습 비교해보세요
그리고 70년대 이바위에 신민아파트가지어져있었다네요
지금은 다 철거하고 시멘트자국을 지워냈지만
정말 한심 스럽지요
옥인동 시민아파트 자리랍니다
이렇게해서 공식적인 인왕산 역사탐방은 끝납니다
일부는 마을버스를이용하여 집으로 향했고요
일부는 걸어서 경복궁역까지 갔답니다
윤동주 하숙집터지요
우리형님 이곳에 왔다 감을 인증합니다
그리고 정말 옛날 책방같은 책방도보고
집앞의 이쁜꽃도 만나고
헤어지지 싫어서 이곳저곳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꿋꿋하게 경복궁역까지와서
헤어졌답니다
전종현 교주님 정말 오늘도 수고 많이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는 항상 교주님을 믿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