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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 2019.11.09. 탕평대성 역사문화탐방

종로구 신영동소재 세검정 정자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 이곳으로 소풍을 왔었답니다

칼을 씻었던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지만

소풍이니까 진탕 놀다온 기억이 가득합니다

실제로 세검정(洗劍亭)은 칼을 씻은 정자라는 뜻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을 왕으로 세운 정변이지요

이때 반란군들이 인조를 옹립하기 위해 이곳에 집결햐여 

계곡의 맑은 물에 칼을 갈아 씻으며 결의를 다졌다는 설이있답니다

그러나 정자는 그 보다 훨씬 옛날 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오랜기간  화재나 홍수로 여러 번 불타거나 떠내려 가서 새로 짓곤 했는데,

현재의 정자는 1977년에 겸재 정선이 부채에 그린  진경산수를 근거로 복원한 것이랍니다.


이곳은 홍제역 1번출구 국민은행 앞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대지요

웅성대는 사람들 대부분이 여성입니다

뭐지?

이들은 종현초등학교 역사문화 탐방 교실 모임이랍니다

오늘 전교생이 모여서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체험하는 날이랍니다


이 분은 학교 설립자이자 역사 선생님 이십니다

이학교는 학생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수업이있을때만 모집을하는 특수학교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 여자가 많아요

어째든 창립자 입장에서 여자면 어떻겠어요 많이만 오시면되지요

일일히 만나서 확인하고 인사하고요

여기가 홍제동이지요


홍제동은 홍제원이 있던 곳이라서 홍제동이 되었답니다

홍제원은 조선시대 때  중국으로 출장가는 공무 여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설치된 여관이랍니다

중국에서 오는길에 위치해있지요 그래서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이 많이 이용하였답니다.

따라서 중국사신들을 위한 공관을 따로 지어 유숙하게도 하였으며,

사신들이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하고 예복을 갈아입는 등 성 안으로 들어오기 위한 준비를 갖추던 곳이었다지요.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으며 언제 건물이 없어졌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답니다.

시작은 유진상가에서 합니다

이 상가는 종로의 세운상가(1967년 완공)와 낙원상가(1968년 완공) 처럼 오래된 건물입니다.

1970년 2개동 5층으로 완공되었으며, 그 당시에는 드문 주상복합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박정희 정권시절 군사적 목적에서 만들어졌다고 하지요.

북쪽을 향한 두 동의 건물은 유사시 적군의 진입을 차단하는 방어벽 또는 차단막 역할을 하기 위하여,

1층의 기둥 틀은 탱크 진지용 이었다고 합니다.

건물 B동이 A동 보다 낮은데요  1994년 개통된 내부순환로가

상가 상부를 지나게 되면서 4.5층을 철거했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원하면 무엇이든 하는 건물입니다


 유진맨션은 당시 일반주택 보다 3배 이상 비싼 고급 주택 이었답니다

1980년대까지 청와대.군부.정부청사.법원.검찰청 등이 기까워

고위 공무원.군장성.법조인 등이 많이 살았다고 하지요.

세월에는 약이없다지요  지금은 ? 이렇읍니다

내부순환도로입니다

사실 본가를 가기위해 정말 많이 다니는 길인데

차타고만 지나갔었기에

고가 아래는 볼 기회가 별로 없었지요

오늘은 아래만 보겠읍니다

개천 이름은 홍제천입니다

왜? 홍제원 근처에 있어서겠지요

홍제원은 옛 서울여상 앞에 있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 후 일본은 청나라 사신들이 한양도성 입성 전,

휴식을 취하며 예복으로 갈아입던 홍제원을 폐쇄시킵니다. 
더 이상 청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섬기지 말란 얘기지요.

이분 오늘은 스타일이 완전 아이돌이지요

학생들중 여자 비중이 높다는 것을 의식하고 오셨나봅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홍제천엔 여성들의 슬픈 얘기도 있습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속환된 환향녀(고향으로 되돌아온 여성)들의 얘기입니다.
환향녀 문제로 골치가 아팠던 인조 임금은 사대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홍제천에서 몸을 씻고 들어오면 과거를 묻지 말고 예와 같이 대하라"는 교지를 내립니다. 
그러나 정절을 잃은 많은 여성들은 환향 후 남편과 자식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했다합니다.

그들을 지키지못한 남성들은 모두 반성해야합니다

후세인 우리까지도요

홍제천 지금 모습입니다

예전에는 무척 지져분햐고 악취도 심했었는데

비교적 깨끗하고 조용해보입니다야더 자세히 살펴봅니다

양지 바른 곳에는 육상조류인 비들기들이 일광욕을 하고있구요

더 깊숙한 물가에는 천둥오리들이

먹이 활동을 하고 있읍니다

오리들 색깔이 이쁘네요

그리고 먹이를 실컷 먹은 두루미는

소화도 시킬겸 하늘을 날고있지요

생태계가 잘 이루어져 있네요

개천을 따라 조성된 고수부지는 이뿌게 잘 가꾸어져있어서

산책이나 조깅하기 아주 좋게 되어있구요

곳곳에 이런 쉼터도 있답니다

늦은 가을 단풍으로 화장이 잘되어있어 모양이 너무 좋읍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입학식을 거행합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 국민교육헌장 낭독등은 생략했지만

격식에 따라 진행합니다

항상 오시던분들이 많이 오는데 오늘은 새로운분이 많이 오셨다네요 

주최자이자 설립자님 인사말씀이  시작합니다

엄청 깍듯하게인사를 하시지요

언제나 철없이 입에서 나오는대로 말씀하시는것 같지만

다 계산된 말씀이고 예의는 다 차리시지요

갑자기 전직이 뭘까? 궁금해지네요

연예인? 사이비 교주? 건강식품 약장수?

어째든 이렇게 나뭇입 구멍으로 보이듯

이 모임은 이분이 아니면 할수없는

이분때문에    생성된 모임이지요

돈생기는 일도 아닌데  너무 고생한다 그지요?

종현초등학교 7학년 생입니다

원래 6학년에 졸업하잔아요

그런데 좋아하는 여학생이있어서 7년째 다니고 있답니다

오늘따리 멋지게하고 오셨네요

그 여학생한테 잘보이려 그렇겠지요

선생님의 강의가 시작됩니다

공부하면 잘 놀던 사람들도 표정이 달라지지요

쉬는시간 신나게 조잘되다가 공부만 시작되면

눈을감고, 먼산을 바라보고, 아까 못한말이 생각나고

심지어는 갑지기 소변이 마렵기까지하지요

이분들도 표정이 지금 딱 그런 표정입니다

이분들이요

앞에 두분말고요 뒤에 두분이요

강의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으시지요

둘이서 계속 같이 다니시던데

아직도 할말이 많이 남아있으신가 봅니다

이분들도 아까 이야기한 그대로이지요

머리푹박고 기도하시는지? 핸드폰에 푹 잠겨계시기도하지요

그래도요

우수학생은 있나봅니다

이분은 정말 그냥 보아도 똑소리가 나지요

정말 진지하게 경청하십니다

머리도 좋으실것 같은데 노력두 많이 하십니다

6학년 학생입니다

아까 7학년 그분이 따라 다니시는 분이요

종현초등학교 전교 학생회장이기도 합니다

공부 잘하자는 훈계가 한창이십니다

예를 들면 공부시간에 떠들지 않기

거리에 침밷지 않기

고무줄 끈지 않기

여자 치마 들추지 않기 등등이지요

다시 고수부지 둘레길을 따라 순례가 계속됩니다

선생님이 개울 건너 마을을 가르키십니다

다리건너 간판을 확대해 봅니다

포방터시장 이라네요

서울에서만 60여년 살았는데 처음보는 이름입니다

이동네를 설명하는 이정표입니다

선생님 말씀도 이정도입니다

어영청을 설치하고 중국에서 신무기가 들어왔을때 이곳에서 사격훈련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종현초등악교 총학생회장님 기념사진 하나 남겨드리고

포방터 시장으로 갑니다

포방터 시장입니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인지

그리 붐비지는 않네요

그런데 이상한게있네요

그림 왼쪽을 봐주세요

이거요

시장의 상징으로 만드어놓았지요

스위치를 누르면 포소리가 요란하답니다

굿아이디어입니다

그런데 포병 아래에는 시레기나물이 널려있지요

그 옆가게할머니가 씨레기 말리기위해 널어 놓으셨나봐요

포방터가 상징고 뭐고 시레기 잘말려서 좋은 값 받고 파는게 우선이란 말입니다

포장포시장

이런 글귀도 참조하세요

잠시 시장안을 살펴봅니다

사람들 줄을 길게 서있네요

뭐하는곳잊요?

연돈이라는 돈가스집인데요

방송에나오는 백종원이가 극찬한 집이랍니다

그래서 시도 때도없이 사람들이 줄을 선답니다

뒤에가면 대기실도 있답니다

이여자분이 주인인가본데요

여기에 이름적히면

줄에서는 해방되나봅니다

어짜피 한끼 아닌가요?

이렇게 몇시간씩 기다려 맛볼 필요가? 가치가?

난 안할레요

야외 수업은  계속됩니다

개천을 따라서

개천따라가는길

저편에 한옥집들이 보입니다

절이지요

앞에 건물은 앞에 창문 같은게 있구요

그 안에 커다란 사람이 보이지요

건물 밖으로 바위가 튀어나와 있구요

뭐지?

보물이랍니다

마애보살좌상이요

마애는 바위에 부쳐를 그려 놓았다는 뜻이구요

보살은 그부처가 보살이란 말입니다

특히 이곳은 관세믐 보살이 계시답니다

좌상은 앉아있는 불상을 이야기하는것이지요

그래서 마애관음보살좌상입니다

그 좌상위에 전각을 만들어서 보도각이라 이름붙였읍니다


보도각은 사찰 옥천암 경내의 거대한 암석에 새겨진 높이 5m의 마애불입니다.

현재 불상이 새겨진 바위는 사면을 모두 개방한 각(閣)을 세워 보존하고 있는데 이건물을 보도각이라한다.


관음보살좌상이 새겨진 바위가 이곳의 핵심 신앙처란 생각입니다.

이 바위엔 많은 전설과 설화가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조선의 건국을 빌었고

또 어느 노총각 나뭇꾼은 이 바위 속 신령님이 중매를 해줘서 장가를 갔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또 조선 고종 임금의 어머니 부대부인 민씨가 새색시 시절,

이곳에서 엄청 기도를 해서 이명복(고종의 아명)을 얻었고 또 왕이 됐다는 이야기도 회자되는 곳입니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가장 용한 기자신앙처(祈子信仰處, 아들점지처)론 '인왕산 선바위'를,

가장 기도발 좋은 소원성취처론 '보도각 백불'을 꼽았습니다.

중간에 연등이 가리고있구요

스님들의 염불을 하고있어 부처의 모습을 자세히 볼수가 없지요

그래서 자료화면을 가져 왔읍니다

부처의 모습에 흰색을 칠하셨네요

그래서 백불이군요

관세음보살님이십니다

원래 관음보살은 '인도 남부 바닷가(물가) 근처 흰꽃이 가득 핀 곳에 주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선지 우리나라에도 관음보살을 모신 사찰은 바닷가에 많습니다

(양양 낙산사 홍련암, 남해 금산 보리사, 석모도 낙가산 보문사, 금오산 향일암 등). 

여기도 풍광좋은 홍제천 맑은물이 관음보살이 살던 동네같았나봅니다

자연석이지요

그 마애불이있는 자연석 측면입니다 한몸인것입니다

소원바위이니 간절히 기도하면 들어준다지요

모두들 진지합니다 
밑져야 본전입니다.
모두들 바위에 손을 올리고 눈을감고 기도에 열중이십니다

소원이없는사람은 없겠지요

밑져야 본전인데

그 진지함이 가득한 몇분 것 모아보았읍니다

이분이 제일 진지해 보입니다

간절함이많은가 봅니다

과연 무슨 소원빌었을까요?

항상 듬직하고 뭐든지 뜻대로 될것같은 대장님도

무엇인지 소원이 있으신가 봅니다

정말 진지하네요

꼭 들어 주실겁니다

빨간모자 아주머니도

혹시 아들하나 아닐까요?

아니면 말구요

막내 세르파님이시지요

이분은 딴것 필요없지요

무조건 그것입니다

좋은 색시 만나게 해달라고

보도각  전체를 바라 본 모습입니다

보도각은 사찰 옥천암의 일부이지요

사실은 옥천암보다 마애불이 더 오래되었다네요

마애불이 있는 곳에 옥천암을 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더 크게 보면 이곳 근처에 장의사라는 큰절이 있었답니다

옥천암도 그 일부였다는데요

열공하는 학생들도 많아요

사실 이야기는 한번 들었다가 뒤돌아서면 없어지지요

그래도 이렇게 사진으로 남기면 꽤 오래가더라구요

잘하십니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와 맺은 '삼전도 맹약'에


“조선은 앞으로 기존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성곽을 쌓지 않는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청나라가 해적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또 청으로부터 "요동을 통해 해적들이 조선을 공격할 지도 모른다"는 공문이 접하게되지요

그로부터 숙종은 전국의 성곽을 점검하고 수리 또는 축조를 명합니다.

숙종은 바로 기존의 성을 보수하고 북한산성을 새로 축조합니다

그후  북한산 비봉과 인왕산 동북편(북한산성과 한양도성 연결)을 잇는 4km의 서성(탕춘대성)을 쌓습니다.

그 탕춘대성의 출입문이 홍지문과 5간수문입니다

숙종 때 축조된 홍지문과 오간수문은 1921년 대홍수 때 유실됐고,

현재는 1977년에 다시 복원한 모습으로, 홍지문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 붙었습니다.


수문마다 도깨비가 그려져있지요

물을 통해서 나쁜것들이 올라 오지 말라고요

무서운 도깨비가 지키고 있지요

탕춘대성이 들어서자 여기에 총융청을 주둔하도록 하여 한양방위사령부로 삼았답니다.

길도 없고 민가도 없던 자하문 밖이 각중에 한양을 방어하는 군사기지로 변한 것이지요

즉 신영(新營)새로운 병영이 들어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레서  이곳이 신영동입니다

군대가 있으니 군량미가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북쪽에 창고를 만들었답니다

그곳이 평창동이지요

그리고 언덕위에 보이는 절이 소림사입니다

중국에 선종의 창시자 달마대사가 지은 절이 소림사이지요

소립사 법당 뒤의 암벽에는 깊은 굴이 있는데,

이성계(李成桂)가 등극하기 전에 이 굴 속에서 수도하고 뜻을 이루었으므로,

1396년(태조 5)에 혜철(惠哲)에게 명하여 절을 짓게 하고

달마(達磨)가 9년 동안 면벽좌선(面壁坐禪)한 숭산(崇山) 소림사의 이름을 따서 소림굴(少林窟)이라고 하였다.

그후 소림사가 되었답니다

멋진 모습의 선생님이십니다

아이돌 공연하는듯하지요

정열적인 모습 감동적입니다


선생님의 강의가 진지하니

학생들도 열심입니다

종현초등학교 앞으로도 번창할것입니다

 홍지문은 한양의 북서쪽을 방어하는 탕춘대성의 출입문으로,

처음엔 '한북문(漢北門)'으로 불리다가 숙종 임금이 홍지문 현판을 내리면서 홍지문으로 불립렸답니다.

조선건국은 유교가 바탕이되었지요

그래서 한양도성을 쌓으면서 유교의 5행 즉 仁禮義知信을 사용하여 4대문이름을 작명했답니다

동쪽의 興之門  남쪽에 崇門 서쪽에 敦門 중앙에 普閣 까지

하지만 북쪽은 肅靖門

5행이 들어갔는데 북문이 이상하지요?

숙정문? 知자가 들어가야하는데요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이 백성들이 많이 알면 정치하기가 힘들어진다고

백성들은 다스려야 한다고 숙청문이라 했답니다

그게 변해서 지금은 숙정문이 되었다지요

그러다 조선이 외세에 침입이 잦아지고 유교의 5행을 지키지 않아서?

그래서 탕춘대성을 쌓으면서 弘門을 만들었답니다

탕춘대성의 성곽 전경입니다

이곳에 유명한 중국 음식점 이라지요

그래서 시작전부터 메뉴를 파악하고 예약했답니다

예약은 짜장면 짬뽕 복음밥으로 해달라 했다지요

이곳에는 북경식 탕수육 꿔바로우가 유명하다합니다


걸려있는 그림하나하나가

맛이 기대되는데요

맛이 기대되는데요

홀을 우리가 점령했읍니다

음식도 정갈하고 맛도 그런대로 좋았읍니다

역시 기획하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왜? 표정이 안좋으세요?

너무 맛있어서 혀바닥을 씹으셨나요?

아니지요 6학년 여학생을 찾아 다니시는거군요

저도 8선생 중국집에서

기념사진 한장 남깁니다

식사후 높은 음자리 조형물이있는 광장에 잠시모입니다

이곳에서 다시 오프닝을 해야지요



일단 부침바위이야기입니다

이곳은 부침바위가 있어서 부암동입니다

부칩바위는 지금은 없어지고 그터에 표시만되어있다네요

춘원 이광수 선생을 아시나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소설 흙을 쓰신분이지요

그렇게 나라를 위해 노력하다가 어느새 친일파가되어 버린분이지요

반민족주위자 처벌특별위원회 즉 친일파처벌위원회에 의하여 체포될때 머물던 집이여기랍니다

저기 간판이 그려져있는건물뒤 한옥집이요

확대해봅니다

기와집이보이지요 

해방후  반민족 친일행위자들을 체포해 심문하던 반민특위가

이승만의 지시로 경찰에 의해 해산된 뒤 춘원은 풀려납니다.
춘원은 한국전쟁 때 효자동 집에서 북한군에 의해 납북된 후 만포에서 병사(病死)했다고 알려집니다

세검정 로타리에서 우측으로 인왕산 북편 기슭에 자릴 잡은 고급 한정식 식당 '석파랑'을 만납니다.
석파랑 위편엔 1958년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3~1981)이 흥선대원군의 별서 석파정 안

청나라풍의 별당 한 동을 옮겨 자신의 별서로 옮깁니다

석파랑은 지금은 고급 한정식 집입니다

소전 손재형이 죽을 때까지 별서로 사용했던 이곳은

1989년 소전의 딸이 현 주인에게 판 후 1993년부터 '석파랑' 한정식집이 됩니다.
 

석파랑 문을 넘고 제일먼저 보이는것이 만세문입니다

만세문은 고종황제 즉위를 기념해 경복궁에 세운 것인데,

일제가 매각하자 손재형이 매입해 이곳으로 옮깁니다

사진 속 만세문은 벽돌 구조에 구름 사이로 불로초를 문 한 쌍의 두루미와

박쥐로 장식을 하고, 지붕엔 기와를 얹었습니다. 

석파랑 초입 '문서루(聞犀樓, 현재 한정식집)'는 서촌 윤덕형의 벽수산장 내 한옥을 통채로 옮겨,

중국풍 호벽을 치고 신라와 백제의 와당을 얹었습니다

팔작지붕의 문양도 우리가 많이보던 모양은 아니지요


별당이 석파정에 있을 땐 동편 방엔 손님이 거처하고,

서편 방에선 흥선대원군이 묵었다고 전합니다

별당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유명한 한옥 장인이 최고급 자재를 사용해 지은

조선 후기 유행하던 중국풍의 건축미 그리고 상류사회의 대표적인 별장 건축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청나라풍의 만월 창입니다


계속해서 해설이 이어지는데요

여기가 지금은 식당이잔아요

주인의 항의 들어옵니다

영업방해

그와 상관없이 멋진 집을 소유하셨네요

또 그만큼 가꾸고 계시고요

보람있게 잘보존하길 바랄께요

내려와서도

강의는 계속됩니다

파란잠바 아저씨 주인이시랍니다

이야기 흥미있게 듣고계시지요

자기도 알고 싶다네요


그리고 불랙야크 산악회라 하니까

보여줄께있다하시네요

뭔가요?

옆에건물은 화랑인데요

지금 산그림 전시가 진행중이랍니다

보고가라고 특별 초대해주셨읍니다


김인순화가 유화작품인데요

어마어마하게 큰 대형 유화입니다

일단 크기에 압도하고요

유화로 입체감으로 표현한 기법이 대단하네요


이그림은 어디인지 알겟네요

설악산 토왕성 폭포를 즈리셨네요

아는장소이이 더욱 친근감이있네요

다른작품들도 힘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애가 타시네요 시간이 없다구요

다시 사람이 모이는동안

기념사진들이 한창입니다

얼굴 들이대시지요

그리고 드디어 6학년 여학생 만났답니다

축하합니다

잘되었으면 좋겠네요


 조기 아레 돌축대요 특별해보이지 않나요?

 1961년 덕수궁 돌담을 철거하고 투시형 담장을 세울 때,

트럭 30대 분의 철거된 덕수궁 자재를 옮겨 석파랑 돌담과 정원 축대로 사용합니다

그중 일부랍니다

이건물을 서울시에서 탐내나봅니다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네요

잘 간직하세요

원앙한쌍이

먹이 활동중입니다

먹구 살아야지요

우린 보기만하면되고요

이분들 여전히 할 말이 많으시지요

오늘 저녁 어떻게 헤어질까?

헤어질 때 집에가서 전화로 자세한 이야기하자구 하겠지요

세검정(洗劍亭)은 칼을 씻은 정자라는 뜻으로,

반란군들이 광해임금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기 위해 탕춘대성에 집결했을 때

계곡의 맑은 물에 칼을 갈아 씻으며 결의를 다졌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있읍니다.



이곳에는 역대 임금들은 선대왕의 실록 편찬이 끝나고 나면 세검정에서 세초(洗草)를 했다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초(史草)를 물에 헹궈 씻었다는 뜻이다.

임금이 승하하면 다음 임금은 즉시 실록청을 설치하고 선대왕의 실록 편찬에 착수했는데,

"춘추관 시정기",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등,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기록한 실록들이다


사관들이 비밀리에 기록해두었다가 훗날 실록청에 제출한 가장사초(家藏史草)라는게 였다.

가장사초는 실록 편찬이 끝나면 끝까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세초를 했는데,

이때 세초를 한 곳이 세검정이었다는 얘기다.

태우지 않고 세초를 한 것은 고급지가 워낙 귀하던 시절이라 재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요즘 이면지를 활용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세초를 한다는 것은 실록 편찬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실록 편찬은 국가적 중대사였으므로 세초가 끝나면 임금은 실록청 종사자들과 사관들에게 세초연(洗草宴)을 베풀었다.

세초연은 세검정 너럭바위에 차일을 치고 성대하게 치러졌다.

지금도 세검정 옆 너럭바위에는 당시 차일을 칠 때 쇠말뚝을 박던 구멍이 그대로 남아 있다.

홍제천변에 있는 세검정,

그 위편엔 연산군이 궁궐에 돌림병이 돌자 대비들을 궐 밖으로 모시기 위해

장의사를 폐찰시킨 후 그 터에 이궁(離宮 = 행궁 行宮)을 짓다가

자신의 향락처인 탕춘대(蕩春臺, 봄날을 질펀하게 즐기는 곳)를 세웁니다


 사화(士禍,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를 통해, 아비 성종이 키운 신진사림들의 힘을 제압한

연산군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파워를 가진 군주가 됩니다.

'조선왕조실록'엔 연산군이 처음으로 전국 기생 중에서 100명을 골라 궁궐로 불렀다고 합니다.

그 때 불러들인 기생들에게 ‘태평함을 나른다’는 뜻으로, '운평(運平)'이란 이름을 붙입니다.

종의 아내, 벼슬아치의 첩, 창기 중 예쁜 여인을 뽑아 운평의 숫자를 추가해 그 수가 1천여 명에 달했는데,

그 후 점점 늘어 9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수많은 기생들은 장악원(궁궐의 연희를 위해 기생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치던 관청)에서 교육을 시켰습니다.


이곳이 탕춘대 터인데요

지금은 고급빌라가되어있네요 

그 중 연산군의 눈에 든 기생들을 궁궐로 부르는데,

그들을 '흥청(興淸, 세상을 맑고 깨끗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흥청 중 연산군과 잠자리를 함께 한 흥청을 1등 흥청이라고 하여 ‘천과흥청(天科興淸)’,

왕을 곁에서 모시며 즐겁게 한 흥청은 2등 흥청인 ‘지과흥청(地科興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주변이 모두 탕춘대 였다 합니다

세검정을 벗어나 북악산 서편 기슭 백석동천(白石洞天)을 찾아 갑니다.

백석동천은 세검정에서 북악터널로 가기전 오른쪽에 신영정이란 정자를 만나면

그 오른쪽으로 들어가지요


백석동천의  '동천'은 '수석(水石)이 아름다워 신선이 노닐만한 곳'을 의미합니다. 

백석동천은 '백사실계곡'이라고도 부릅니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호)'란 이름이 붙은 탓에 한땐 이항복의 별장터로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가는길은 이렇게 주택가를 통해서 갑니다


주택가를 지나면서

가을이 흠뿍 머금은 숲길이 나타나지요

백석동천으로 가는 초입, 현통사가 보입니다.

현통사(玄通寺)는 '일붕선교종' 소속 사찰입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한 일붕 서경보 스님이 불교의 새로운 종파

일붕선교종울 세우고 스스로 개조(開祖)가 되었답니다 


일붕선교종은 석가모니불을 교조로, 고려 말 태고 보우국사를 종조로,

종단 창시자인 개조는 일붕존자(일붕 서경보)로 한 신흥 불교종파입니다.

대웅전앞에

두 미녀가 서있읍니다

이분들은 절대로 수업에는 관심이 없지요

국어시간에는 영어를 영어시간에는 수학을 공부하시는분들이지요


현통사 앞 120m 깎아지른 계곡 속에 '동령폭포(백사폭포)'가 있습니다. 
북악산 기슭에 밀집된 가옥들 속에 숨어 그 모습을 자세히 볼 순 없으나,

조선시대 문인들의 개인문집에 간혹 언급되는 폭포입니다.

사진의 다리 밑으로 폭포가 있다는것인데

안보입니다

학생들 공부하는 모습을 담아보았읍니다

조금은 지친듯하네요

하지만 아직도 받아드릴 준비는

한분은 눈에 졸음이 가득합니다

역시 이분은 모범생입니다

아직 눈동자도 똘똘하고요

정답 외치는 소리도 산속이 진동합니다

동령폭포를 본 후 북악산 쪽으로 오르면 백석동천(백사실계곡)이 실체를 드러냅니다. 

처음오는 백사계곡에

저도 인증한번합니다

사실 처음온 저로서는 어디가 어딘지 구분은 안되만

전체적으로 아늑하고 포근하다는 느낌이듭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을 받았을 때 문화재청 유홍준 청장을 불러 "백석동천에 같이 가자"고 제안합니다. 
백석동천을 둘러본 유 청장은 노 대통령에게 "이곳은 처음 봅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문화재청에 돌려주겠다”고 유 청장에게 말합니다.
당시 이곳은 1968년 1.21 사태(김신조 일당 청와대 습격사건) 후 청와대 경호구역으로 됐기 때문입니다.

백석동천은 조선시대 조성된 별서 터로 건물터와 연못터 그리고 계곡으로 나뉩니다.
이곳에 관한 최초 기록은 "허씨가 지은 모옥(초가 정자) '간정료(솥을 보는 집, 차를 끓여 마시는 집)'가 있었다"는 기록입니다.

 1820년 환재 박규수(1807~1876, 연암 박지원의 손자)는 “석경루(세검정 남편) 북쪽 경치는 기이하다.

그 위에 백석정 옛 터가 있다.

세상에서 말하길 허씨 성을 가진 진인(眞人)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고 기술하고,

“백석정은 세상에 전하길 허도사가 단약을 달이던 곳”이라고 주석까지 달았습니다.

1820년 당시 백석정은 폐허가 됐던 모양입니다

백석동천 내 별서는 일제시대 여러 번 주인이 바뀌며 1967년까지 존재하다가

1970년경에 무너졌고, 연못가 정자는 한국동란 때 없어집니다

잠시 아름다운 경치에 빠져봅니다

그리고 그속에 종현초등학교를 심어봅니다

누가 더 아름다운지?


모두 한마음되어

화이팅을 외칩니다

종현초등학교여 영원하라!

그리고 암각문 월암을 찾아갑니다

백석동천 서편 기슭 바위엔 암각문 '월암(月巖)'이 새겨졌습니다.
월암 이광려(1720-1783)가 허씨 모옥에 들렸다가 쓴 각자(刻字)인지,

이곳에 살던 별서 주인이 바위에 올라 둥근 보름달을 감상하던 바위인진 알 수 없습니다.

머리에 단풍하나걸고

우리도 기인이되어 백석동천속으로 계속들어갑니다

공부는 계속되고요

열강에 심취는모습은 보기에 좋읍니다

이중에는 엄마 따라온 효자도 눈에 들어옵니다

아직도 전화에 관심이 많으신분도 있읍니다

그리고 끝까지 인원통제를 위해서 노력하시는 봉사자도 있지요

노오란 은행입을

하늘에 뿌리고 포ㅎ하는 모습은 오늘을 만족한다는것 이겠네요

그리고 바로

백사실계곡 출구(부암동 방면 입구)에 '백석동천' 암각문이 보입니다.

이곳은 부암동 방면에서 올라오는 백석동천 입구입니다


차례대로 기념을하고 계시지요


이렇게 하여

오늘 애외수업이 마감됩니다

오늘 선생님은 물만난듯 정말 정렬적인 강의를 해주셨읍니다

아마 서울이 홈그라운드라서 더욱 그랬나봅니다

어떻게든 한군데라도 더보여 주시고 싶어하구요

어떻게하든 한가지 사실이라도 더알려주려하시는모습에

감도 또 감동이었읍니다

그져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정도의 정성이 들어갔는데

어찌 학교의 설립자가 아니되겠읍니까?

아니 종현교의 교주라해도 전혀 문제없을듯합니다

감사하구여

항상 건강하시어서 오랫동안 우리와 같이 여행도하고

공부도 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수고하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