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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2019.09.13.북한산성종주

"이판 사판"을 아시나요?

조선시대 억불정책에 의하여 사찰들이 폐사 위기에 처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사찰의 폐사(廢寺)를 막기 위해 스님들이 많은  노력을 했답니다

일부는 기름이나 종이, 신발을 만드는 제반 잡역(雜役)에 종사 했다지요

특히 관가나 유생들이 승려들에게 종이만드는 일을 시켰는데

조선시대에 사용된 종이는 거의 대부분이 사찰에서 만들어졌다 합니다.

또한 산성을 축조하는 노역에 그리고  성의 수비를 승려들에게 분담하였답니다.

이런 잡역에 종사하는 승려를 사판승(事判僧)이라고 불렀다지요.

또 이런 것도 꼴보기 싫은 중들은 깊은 산속에 은둔(隱遁)하여 참선 등을 통한

수행으로 불법을 잇는 승려들도 있었답니다.

이들을  이판승(理判僧)이라 하였답니다

이들 모두 불교의 존속을 위해 노력했지만

조선의 억불정책은 불교에 있어서는 최악의 상태였디지요.

승려는 최하 계층의 신분이었으며, 도성(都城)에서 모두 쫓겨나고 출입도

금지되어 있었답니다.

자연히 당시에 승려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막다른 마지막 선택이었고

그래서 이판승이 되거나 사판승이 되거나  그 자체로 '끝장'을 의미가 되었지요

이판사판이 되는것이다

그중 사판승들은 각종 토목공사에 착출됩니다

대표적인 일이 임금의 묘역을 만드는 일과 산성을 만드는 일이지요

여기 북한산성도 사판승들의 힘으로 만들어 졌답니다

   

임진왜란이다, 병자호란이다

임금이 여기저기 피난다니다 보니 너무 힘들었답니다

그래서 도성 가까이 성하나를 만들자고 했지요

당시 청나라가 알면 어찌될까요?

현재 핵무기를 만들겠다고 미국에 말 하는것과 마찬가지겠지요

어쩌겠어요  몰래 만들었답니다

그것도 엄청 단기간에 6개월 걸렸다지요

총 15Km 대문 5개 암문 7개 수문 1개를 만들고

중앙에 임금이 머물수있는 행궁을 만들었답니다

그후 숙종임금이 시찰하여 성의 보강을 요구하였고

그래서 대서문 위에 중성문을 축성하였답니다

그래서 총 6대문 7암문 2수문을 갖는 성이 됩니다

물론 중앙에 임금님이 머물 수 있는 행궁도 지었답니다 





오늘 산행한 트랙입니다

산성입구에서 시작합니다

예년과 달리 의상봉 방향으로 시작했읍니다

여건상 중성문과 행궁은 갈수 없었네요

그래서 오늘 산행은 12성문을 모두 돌아보는 산행입니다


약18Km를 걸었네요

최근들어서 꽤나 긴 산행이었지요

그만큼 오래 걸렸네요

9시간 30분 생각보다 1시간정도 더 걸렸네요


일부러 자를 가지고 산성입구로 왔답니다

다른곳에서하면 접근하는 시간이 꽤걸리잔요

그래서 이곳을 택했지요

이른 아침 명절 전날이라 그런지 사람이 없네요

앞에보이는 산이 의상봉입니다


왼쪽으로 돌려보니 노적봉 백운대 그리고 원효봉보 보입니다

거기서 마무리하겠지요

평상시 휴일 같이 않게

기분좋게 오릅니다

기분좋게 오릅니다

마음먹은 코스를 확인해보고요

일단 대서문까지 가기로 했읍니다

중간에 의상봉가는 이정표가 몇번 나오지만

일단은 데서문이 먼저입니다

이곳도 의상봉을 갈수있는곳이지요

하지만 그냥 통과합니다

대서문인데

옷을 입구 있네요

하늘색 망사옷이요

오래되면 수리도 해야겠지만

오늘 내가왔는데?

북한산성을 쌓을 때에는 전국 승려들 동원되어 성능의 감독 아래 공사에 참여하였으며,
성이 완공되자 승군으로 하여금 성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승영(僧營)을 치영(緇營)이라 하는데 남한산성의 남한치영에 대응하여 북한치영은 승대장(僧大將) 1인 이하 350인으로 편제되었다.
승군대장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겸하고 있었는데, 초대 승군대장에 성능이 임명되었다.
치영의 승군들은 낮에는 무술을 익히고 아침·저녁으로는 불경을 공부하면서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산성 안에 많은 절을 창건하여 승군의 병영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당시 병영으로 이용되었던 사찰은 도총섭이 머물던 136칸의 중흥사를 비롯하여
태고사·서암사·용암사·보국사·보광사·부왕사·원각사·국녕사·진국사·상운사 등 11개 사찰과
원효암·봉성암 등 2개 암자가 있었다.
당시 건립된 사찰의 위치를 보면 전통의 가람 배치방식을 따르지 않고 대부분 성문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함으로써 산성 수비가 주된 건립 목적의 하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조한 후 군인들의 식솔들이 산성 내에 거주했는데

그곳이 몇 해 전까지 식당촌이 있던 북한산 북한리 산성마을입니다.

북한리 산성마을은 예부터 내려온 60여 호의 마을이었습니다.

산성마을 사람들은 예부터 약초를 캐거나 산짐승을 잡으며 삶을 영위했습니다.

아직 곳곳에 사람이 거주했던 흔적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