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BC18년 온조왕의 건국이래 660년 의자왕 멸망까지 688년간 존속했던 백제이다
처음 번창했던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며 번성기를 누립니다
그후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의하여 개로왕이 아차산에서 참수당하고
부랴부랴 지금의 공주로 남하합니다
그곳이 지금 공산성입니다
공산성에서 전열을 다듬은 백제는 무녕왕 성왕 때 다시 부강하며
사비(현부여)로 천도합니다
오늘 역사탐방은 그 백제의 중심부를 들어갑니다
공산성, 고마나루, 부소산성 그리고 정림사지로
BC18년 온조왕 백제 창건 | 493년 | 475년 22대 문주왕 공산성 천도 | 64년 | 554 26대 성왕 사비성천도 | 131년 | 660년 31대의자왕 백제패망 |
한성백제시대 | 공산성시대 | 사비성시대 |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되어 660년에 멸망할 때까지 700년 동안 존속했던 고대 왕국으로,
한반도에서 형성된 초기 삼국 중 하나였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시, 부여군, 익산시 3개 지역에 분포된 8개 고고학 유적지로 이루어져 있다.
공주 웅진성과 연관된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
부여 사비성과 관련된 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부여 나성,
그리고 사비시대 백제의 두 번째 수도였던 익산시 지역의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 등으로,
이들 유적은 475년~660년 사이의 백제 왕국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백제역사유적은 중국의 도시계획 원칙, 건축 기술, 예술, 종교를 수용하여 백제화(百濟化)한 증거를 보여주며,
이러한 발전을 통해 이룩한 세련된 백제의 문화를 일본 및 동아시아로 전파한 사실을 입증하였다하여
2015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합니다
공주의 명칭은
백제초기에는 웅진으로 불리었다지요
웅진(熊津)은 우리말로 하면 곰나루터이지요.
곰나루의 곰자가 변하여 공자로 되었고
그 공(公)에 고을주(州)을 붙여서 공주(公州)가 되었다네요
웅진은 한자의 훈을 따온것이구요
공자는 음을 따온것이겠네요
여기는 첫번째 방문지 공산성입니다
공산성은 당초 토성으로 쌓아졌다하지요
그러나 공산성도 역사적으로 고려 조선을 거쳤겠지요
처음에는 고구려에 대항하여 쌓았지만
조선때는 왜군을 대항해 개축했겠지요
그때 토성위에 돌로 석축을 쌓았답니다
특히 남쪽을 향해서 말이지요
금서루 올라가는길에 비석들이 서있다
뭔비석?
별것 아니란다 공주시내 곳곳에 있는 비석들을 가져다 모아 놓았단다
중요한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공적비이다 군수공적?
공산성은 고구려에 쫒겨서 급하게 만들었을거라지요
그러니 계획적인 성이라기보다는 일단 방어가 가장 먼저였던것 같읍니다
규모도 엄청작지요
총 성곽의 길이가 2Km도 안된답니;다
문이 4개가 있다지요
동,서,남,북으로요
그래서 영동루,금서루,진남루 그리고 공북루로 전부 위층에 누각을 만들어 놓았네요
여기는 서쪽 문인 금서루입니다
개축했겠지요
성곽이 잘 다듬어 져 있읍니다
그위로 모양 내느라 깃발이 꼿혀있지요
무슨 깃발이라 쓰여있는데 그냥 시절 문양을 흉내 냈겠지요시
성곽 내부에서 바라본 금서루 입니다
역시 이자리 터만 있었다는데
물론 백제 때 건물도 아니고
이조시대보다도 더 잘 쌓아놓은것 이랍니다
현지 해설사분이십니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정말 느긋하게
꼭 손자에게 옛날이야기하시듯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금서루에서 바라본 북쪽 공북루입니다
그뒤로는 금강이있고요
강건너 도시가 형성되어있네요
아마 도읍을 정하면서 물을 방어선으로 했을듯합니다
강넘어 도시는 신도시 이겠지요
이쪽은 북쪽 방향이구요
해설자 님의 인도하에 잘 가꾸어 놓은 성곽길 따라 진남루 방향으로 갑니다
길이 이쁘지요?
데이트하기 좋겠어요
데이트하면서 역사이야기도 하견 지루하지도 않을껏입니다
성곽따가 왼쪽은 도성안이구요
오른쪽은 성밖입니다
성안에는 왕과 그외 관계되는 사람들이 있었을테고요
성밖은 일반 백성이 살았겠지요
이곳이요 성바ㄲ 백성이 사는곳
이곳이 백제 수도서울 웅진의 전부입니다
백제가 작은 나라가 아닌데
참 좁다 하고 생각이 들지요
그것이 이곳 공산성이 64년밖에 있지 않은 이유 일것입니다
공주를 들여다봅니다
공주? 백제만 있었던것이 아니지요
그후 고려도 있었구요 조선도 있었답니다
그리고 일제도 격었구요 625도 격었답니다
즉 우리의 역사를 같이 겪었답니다
그공주속 황새바위 모습을 땡겨 보았답니다
천주교 순교 성지라지요
엄청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여기서 순교했답니다
공주는 동학의 흔적도 있다합니다
왜 그것뿐이겠어요
다시한번 1500년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고요
성곽을 따라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갑니다
진남루 가기전에 커다란 공터가 나타나지요
여기가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물론 워낙 오래되어 건물은 없겠지요
백제의 연못이라 이름이 붙여져 있네요
당연히 왕궁이니 이정도의 우물이있어야겠지요
하지만 이곳은 샘물은 아니랍니다
물을 저장해서 사용한 흔적이있다지요
물땡크입니다
그림이 다닥다닥 붙여놓은곳이 왕궁추정장소입니다
나온 유물을 사진으로 전시중이지요
너무 오래된 흔적이라 전문가가 아닌 우리는 잘모르겠네요
이곳은 아직도
발굴작업이 진행중입니다
잘 조사해서 정확한 역사를 밝혀주세요
백제의 수도 공산성
이곳은 백제의 흥만 있는것이 아니지요
백제 패망 의자왕의 최후 여기에서 항복했다합니다
이곳 왕궁터는 지금 벗꽃이 한창입니다
이벗꽃 지금은 보기 좋지만
이역시 역사의 한편입니다
일제때 심은 벗남라네요
벗꽃 역시 화려합고 곱습니다
요즘 전국 어딜가나 벗꽃이지요
마치 벗꽃이 우리나라 국화인듯 어딜가도 벗꽃이지요
일제도 벌써 8,90년이 되었지요
그러니 나무도 그만큼 오래 되었네요
역사가 어찌되었든 일제가 어째든
지금은 밝고 이쁜꽃을 즐기면 되는거지요
이곳에는 또하나의 역사 현장이 있지요
조선시대 임금님 인조 이야기입니다
앞에 정자가 그인연인데요
쌍수정입니다
여기에도 역사가 있네요인조반정의 공신 이괄이요
이사람이 자기 공적에 비하여 보상이 적다고 난을 이르켰지요
서울을 점령했지요
인조가 이곳 공산성으로 피신을 했다지요
이곳에 올라 한성에서 좋은 소식오길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얼마나 간절했을까요
그자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2그루가 있었답니다
그나무들과 친해졌답니다
그 나무들이 많이 의지가 되었답니다
정이 많이 들었다지요
환도후 그 느티나무에게 벼슬을 주었답니다
정삼품이요
이느티나무가 그나무는 아닙니다
그나무들은 늙어서 죽었답니다
한참지난후
목사가 그2그루 나무를 기리고저 정자를 지었답니다
그이름도 2그루 나무를 생각해서 쌍수정으로 했다지요
아래에는 벗꽃속에 홀로 서있는 집이 있지요
가보야겠네요
가보야겠네요
쌍수정 사적비입니다
비문은 역사서이지요
이비문에는 인조가 피난온 배경
그리고 여기 생활을 기록한 역사서 입니다
쌍수정 아래
이쁘게 핀 꽃입니다
정말로 이쁘지요
이제 우리 역탐대원들은
성곽 순례에 들어갑니다
성곽 안내도 입니다
저아래 보이는 건물이 남대문인 진남루 입니다
진남루가 정문이라지요
시간 관계상 진남루는 여기서 바라보고
그리고 계속해서 성솩을 따라갑니다
저기 언덕위 기와지붕이보이지요
동대문입니다
형동루라 했나요
겯눈으로 보고 계속 진행합니다
높은 토성이 보이지요
데크가 있으니 전망대가 있나요?
전망이 기대가 됩니다
서거정?
인터넷을 찾아보니 집현정 학자이네요
이분이 공주 여행중 공주 10경이란 시를 지었답니다
그10경이 여기에 다있지요
금강이지요
무주왕이 고구려를 피해 남하하면서
이곳 공산성을 새로운 도읍으로 삼지요
그것은 이 금강이 있어서겠지요
강으로 북방 고구려를 우선 막겠다는 겁니다
지금이야 다리도있고 육상 운송이 최고였지만
그무렵은 해상이 주요 교통수단이지요
그교통수단이 머무는 고마나루가 여기에 있지요
전면입니다
아파트가 숲을 이루었네요
공주의 신도시입니다
여기도 강이보이는 아파트가 값이 많이 나가겠지요
그리고 오른쪽 상류입니다
멋지지요
이런 풍경이 공산성이 가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금강에서
오늘 역탐 인증사진 남깁니다
그리고 지속해서 성곽을 순회합니다
전망대를 지나면 이렇게 내려가는길입니다
정말 멋진 공산성입니다
다시 공주에 와도 여기를 오고싶습니다
저아래 성곽 밖으로 루각이 보이지요
만하루 ㅇ와 연지입니다
인조인금이 6일간 머물었던곳이라
유명한 사찰 영은사입니다
그유명세에비해 볼것없는 절입니다
위에서본 모습입니다
법당 요사체 그리고 산신각이 모든 구성입니다
영은사를 지나 다시 왕궁터로 가던중
오른쪽으로 돌아보면
또 다시 누각이보입니다
북쪽문이지요 공북루라고 부른답니다
공북루로 가는 길에는 오래된 고목이 있습니다
이곳 분위기를 살리게에 충분한 나무이지요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성곽입니다
깃발아레가 공북루 언덕위가 광복루입니다
그르고 성관 안쪽은 성안마을이고요
오른쪽은 금강입니다
성곽길 정말 산책하기 좋은길이지요
이곳이 성안마을 터 입니다
일제때 김갑순이라는 사람소유로 커다란 쌀창고가 있었답니다
공북루의 강쪽에서 본 모습입니다
원래 망북루라 했다가 공북루로 바뀌었다네요
문밖은 금강과 접해있지요
성안에서 바라본 공북루입니다
이문은 다른문과 다르게 현판이 성안쪽에 붙어있지요
아마 사람들이 주로 나가는 문으로 사용되었나 봅니다
아래는 문이요 위는 루각으로 형성되어
금강의 멋진 풍경을 바라보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 아난가 생각됩니다
성안 마을쪽에서 바라본 공북루의 모습입니다
성곽으로 계속이어가면
언덕위에 루각이 보이지요
김구선생이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광복루입니다
이렇게해서 공산성을 마칩니다
그리고 다음 탐사지안 고마나루로 갑니다
고마나루 주차장입니다
여기서 김밥을 먹었지요
미리주문한 김밥과 만두를 배달받았답니다
맛이요?
싼게 비지떡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시간
드틈에 바쁘신분들이 계시지요
알면 고생입니다
모르는 우린 편하게 쉬는데
이분들 바쁘시지요
고마나루 역사탐방은 계속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곰나루 탐구에 들어갑니다
공주가 곰나루에서 시작되었다고 했지요
다시 말하면 곰나루의 한문 표기는 웅진이되고요
곰의 음을 따서 곰이 공으로 변하고 그뒤에 마을주자를 붙여서
공주가 되었답니다
그 공주의 원류는 이 고마나루입니다
이곳 곰나루에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줄거리는 이러하다.
옛날 한 총각이 연미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바위굴에 들어가 쉬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아름다운 처녀를 만나게 된다.
총각은 처녀와 굴속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부부의 연을 맺는다.
이후 며칠을 지내는 동안 매일 굴 밖으로 나가 음식을 가져오는 부인을 이상하게 여기고
따라간 총각은 그녀가 곰으로 변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후 부자연스러워진 남자를 의심하게 된 암곰은 그를 굴속에 가두고 살았지만
자식을 둘이나 낳은 후에 남자는 도망쳐 금강을 건넜다.
상심한 암곰은 자식을 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
그 후 이 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풍랑으로 뒤집히는 일이 많아졌다.
그래서 강 옆에 사당을 짓고 곰의 넋을 위로했다는 전설이다.
당연히 곰을 모시는 사당하나쯤 있어야겠지요
곰사당의 유래를 기록한 비문입니다
그리고 사당안에 곰형상의 바위이고요
이제 실제 나루를 보러 갑니다
금강의 수신을 받들어 제사를 제내던곳입니다
운진단이라 했고 지금은 그자리입니다
웅진단은 처음에는 곰에대한 제사를 지냈으나
차차 수신에대한 제사로 바뀌었답니다
그리고 앞에 보이는 곳이 고마나루로 추정되는 지역입니다
지금은 그흔적을 전혀 볼수 없지만
이곳이 공산성의 중요한 교통 요지 였으겁니다
이렇게하여 오늘 두번째 탐방지인 고마나루를 떠ㅏ고
부소산성이있는 부여로 출발합니다
공산성이 너무 작았겠지요
아니 백제라는 나라의 수도가 되기에 백제는 너무 큰나라였읍니다
강국을 선언한 백제는 더큰 수도가 필요했읍니다
그래서 부여에 부소산성(사비성)을 짓게됩니다
이곳에서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하기까지
이곳을 수도로 생활합니다
이곳은 538년(성왕 16)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여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국도를 수호한 중심산성이었다. 대개 성왕의 천도를 전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500년(동성왕 20)경 처음 테뫼식 산성을 축조하고, 성왕이 천도할 무렵 개축한 뒤 605년(무왕 6)경 완전한 성을 이룬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주차장에서 300미터쯤 힘들다고 생각할무렵쯤
멀리서보아도 해설사라는것을 알만한 분이 서계십니다
사실은 마이크때문에 알았답니다
자기소개중이지요
항상 처음만나면 화면조정시간을 같잔아요
이분도 우리가 역사문화 탐방으로 오셨다고 약간은 긴장하신듯합니다
시작은 역시 백제 천도부터 합니다
고래서 공산성 사비성으로 이어지지요
그런데 이분은 신라분이시랍니다
신라중에서도 거제에서 태어나셨다는데요
아까 공산성의 해설사님과는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일딴 말이 빠르다는겁니다
훨씬 맘에 들더군요
사비성 전체에대한 개념도입니다
물론 성안만 있는게 아니고요
성박의 도시까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일단 부소산성은 삼충사를 가고요 산성의 남문이있었던 남문지를 갑니다
그리고 백제시대 건물이있었던 군창지,건물지로 갑니다
정상에있는 사자루를 두루고
하이라이트인 낙화암 고란사까지 탐방하는것으로
부소산성의 탐방을 마칩니다
삼충사의 정문인 의열사입니다
사당의 문은 3개로 구겅되어있지요
일반백성은 들어가는문 나오는 문이 따로있지요
동문 서출이라고요
반듯이 동문으로 들어가고서문으로 나와야합니다
물론 가우ㅜㄴ데문은 임금님이 출입하는 문입니다
삼충사의 뜻은
백제의 충신인 성충, 홍수, 계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57년에 세운 사당입니다. [
성충은 백제 의자왕 때 좌평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구요
흥수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자 탄현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신하이지요
계백은 신라 김유신장군의 5만군이 황산벌로 쳐들어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 황산벌에서 장렬히 죽은
너무나 유명한 장군이지요
모두 모셔야할 아니 본받아야할 유명인이십니다
그래서 이사당을 만들었겠지요
이건물은 고증에의한 백제 건물 양식으로 지었답니다
지붕의 장식기와입니다
치미라 부른답니다
건물에 이젓이있다면 백제 건물입니다
삼충사가 위치한 곳 전경입니다
성벽쪽 암벽을 발파해서 위치하고 있지요
사실 자연경관을 해쳐가면서 만들었을까?
의문했는데요
이터는 일제때 신사를 만들려고 잡아놓은터랍니다
그래서 그자리를 흉하게 할수없어 삼충사를 지어
선인을 기리는 장소로 바꾸었다지요
역시 슬픈 역사입니다
이곳은 사비성의 남문이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자리입니다
우리 역탐 대원들이십니다
무척 진지하시죠?
그만큼 이곳 탐사가 우리의 일이기때문입니다
이분 우리역탐의 교통부 장관이시지요
정말 역사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바쁘고 힘든 상황에서도 한마디라더 더 들으시려는 가륵한 마음이보입니다
당신을 진정한 역탐 용사로 지명합니다
그외에도 많은 분들이 진지하게 경청중이십니다
성곽 구조에대한
사비성을 마치고
부여중심에있는 정림사지를 찾아갑니다
국보인 5층석탑을 만나기위해서 이지요
상당한 의미가 있는 탑이라지요
일단 예약되어있는 해설사님을 만납니다
전형적인 부여분 같읍니다
자기소개부터 그리고 자랑까지로 시작합니다
고구려 불교전파 | 백제불교전파 | 신라 이차돈 | 최초의탑 | ||||||
분황사9층탑 | |||||||||
372 | 384 | 527 | 634 | 538 | 660 | 751 |
정림사의 연대는 확실치 않답닏
다만 사비천도후 백제멸망까지 즉 538년에서 660년사이로 추정된다지요
탑이요
원래 사리를ㄹ 넣는 무덤같은 역활을 했다지요
처음 인도에서는 목탑이었다지요
중국은 전탑이고요 한국은 석탑이랍니다
그런데 정림사지석탑은 목탑을 닮았다합니다
그래서 유명하고 국보까지되었답니다
정림사 정문에서본 전경입니다
일단 이정도에 일주문이 있었으것으로 추정되며
탑앞부분 연못이있지요
영지입니다
부처의 세상으로 들어가기전에
연못에 몸을 비추고 마음을 비우고
그리고 조금 가까이가서 보지요
영지입니다
정림사지의 강당지 한복판에 있는 고려시대 불상. 보물 제108호. 높이 562㎝.
거불로 오른팔과 왼쪽 무릎이 떨어져나갔고 몸체의 마멸이 심한 편이다.
또한 머리부분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전체적인 양식고찰이 어려우며,
왼손의 윤곽으로 보아 지권인을 취한 비로자나불로 추정된다.
대좌는 불상에 비해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며,
3단의 팔각연화대좌이다. 상대에는 앙련이 조각되어 있고, 팔각의 간석에는 큼직한 안상이 표현되어 있다. 하대의 윗부분에는 복련이 있고, 아래의 기단석에는 각 면에 안상이 3개씩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남원 만복사지에 전하는 고려 전기의 석불대좌 등과 비교되므로 정림사 중건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