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西村)은 서울의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있는 지역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흔히 '장의동'(藏義洞, 壯義洞)이나 '장동'(壯洞)으로 불리었었다.
서촌은 창덕궁 남쪽의 교동이나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북촌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다.
조선 시대엔 왕족과 사대부, 중인들의 거주지로 유명했으며,
일제 시대 이후엔 문인과 예술인들이 많이 자리잡았단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집권 이후 경호와 경비 목적으로 여러 규제를 받아 쇠퇴했으나,
최근 북촌과 함께 관광명소로 주목 받고있는 곳이다
그런 서촌을 그냥 관광으로 다니기에는 우린 너무 지식이 고프다
오늘 역사문화 탐방은 경복궁역 3번출구에서 시작합니다
아래지도의 빨간색 라인이 지나간 괘적입니다
창의궁터 쌍홍문 통인시장 자수궁터
벽수산장 수성공원 필운대를 거쳐서
사직공원에서 마무리 합니다
거리도 5KM가까이 되었지요
시간도 거진 5시간이 다 걸렸습니다
정말 수고하셨네요
정확하게 13:00
약속장소인 경복궁역 3번출구에 도착합니다
가는날이 장날인가요?
오늘따라 이곳 통인동에는 노동단체의 대규모 시위가 있네요
당연히 경찰과 시위대로 가득합니다
거기에 국내외 관광객도 주말을 맞이하여 엄청 많습니다
그 만큼 혼잡해서 우리 식구 챙기기도 쉽지가 않았답니다
그래도 그많은 인파속에서도
낮 익으신분들이 많이 보이시지요
이 분은 왕언니이십니다
표현이 괜찬으신가요?
반갑습니다!
눈을 더 돌려봅니다
왜냐구요?
이분을 찾는 거지요
언제든 여자만 좋아하시는 분이요
눈은 마주쳐야 하는데
워낙 바쁘시니 천천히 보시겠지 하고 기다립니다
이제 시간이 흘러서 어느 정도는 인원이 되었지요
무언가를 하기에는 여기는 너무 복잡하지요
자리를 옮겨봅니다 사람이 많아서 그것도 쉽진 않네요
한가한 곳을 찾아갑니다
그렇게 좋은 자리는 아니지만
야기 유료주차장 앞입니다
잠시 빌리는 것입니다
이정도라도 의사소통은 문제 없네요
시작입니다
"저는 서울시 문화해설사 전종현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서울시 해설사 표찰을 보여주십니다
사이비 약장사가 하는 숫법과 비슷하지요
하지만 이분은 순수하신분입니다
우리는 믿사옵니다 교주님을 요
그리고 오늘의 주재인 서촌에 관한 일반적인
개념을 설명하십니다
우리는 알든 모르든 그져 믿을 뿐 입니다
그리고는 다음 장소로 이동합니다
오늘 첫번째 장소입니다
문화사? 지질문화보존 연구소? 뭐지?
이집이 맞기는 한데요 이 간판은 아닌가 봅니다
이곳은 창의궁 터라 합니다
그럼 창의궁은?
영조의 잠저로 영조가 연잉군 시절에 살던 곳이랍니다.
뭔 말씀을 많이 해주셨는데요
도통 모르겠네요 그래서 인터넷에서 살짝 컨닝했읍니다
이곳은 원래 효종의 딸 숙휘공주와 부마 정재현이 살았는데
숙종이 연잉군에게 하사했다 합니다.
경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세제 연잉군이 경종의 뒤를 이어 영조로 즉위했읍니다.
그 후 효장세자가 죽자 이곳에 효장묘를 세우고 의소세손 사후엔 의소묘를 세웠구요.
순조 때는 효명세자 사당인 문호묘를 세우기도 했다지요.
1870년 문효세자의 문희묘가 이전하면서
이곳은 영조, 장조, 정조, 순조 장남들의 사당이 되었었답니다
그앞에있는 백송입니다
백송은 입은 소나무인데 줄기가 하얗게 생긴 나무이지요
이백송은 우리나라 백송 중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지요
그런데 안타깝게 1970년 태풍으로 고사하였답니다
그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작은 백송을 3그루 심었다지요
원래 사신이 올때 특이한 식물은 실물로 오기 힘드기 때문에
씨앗으로 가져 온다 합니다
이소나무도 사신이 가져온게 아닐까 추측 됩니다
새로 심은 백송중 하나입니다
할아버지 나무 옆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읍니다
다른쪽 벽면입니다
액자가 걸려있지요
주변에는 낙서가 되어있네요
원당선생초상?
해설사님 뭐라고 하시며 여기는 그자리가 아니랍니다
잘못 걸려있는것이랍니다
미련 없이 통과 했답니다
그래도 우리나라 궁궐 바로 옆동네이고
우리나라 제일 높은분이 살고 계시는곳이 멀지 않은데
이런 작은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네요
이동네분들은 차량도 없겠네요
그래도 골목 곳곳에
삶의 현장이있지요
간판이있다는건 사람을 기다린다는 겻이겠죠
그길중 어느 한옥집
마당은 열려있구요 담장에는 가시가 긴 탱자나무를 키우고 있읍니다
최고급 자가용도 있읍니다
이집은 원래 게스트하우스였다지요
그리고 영화 "수상한 그녀"의 촬영장소였답니다
별거는 아니구요
한옥의 구조에 대하여 설명하셨답니다
그런건 우리 이제 식상했지요?
또 작은 골목을 통과합니다
작은 골목길입니다
그런데 미로미로네요 작은길, 아름다운길이요
그좁은길에 화분이 가득입니다
지금은 제철이 아닌대도요
어디는 꽃들이 만발하기도 합니다
생전처음보는 종교입니다
이들의 집단 거주 촌이기도 한다지요
그 종교의 교회당인듯합니다
그리고 골목을 벋어나니
시위용차량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대치해야하는
우리 젊은 청춘들도 있구요
그런속에서도 우리의 강의는 계속됩니다
종로에 있는 재미난 동명을 살펴보면 종로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효자동'은 효심 깊은 두 아들의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쳐들어왔습니다.
지금의 효자동에 임천 조 씨의 효심 깊은 쌍둥이 아들 '희정'과 '희철'은
어머니를 해치려는 왜적에 온몸으로 막아서다 그만 저세상으로 갔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지금의 효자동 100번지에 홍살문을 지어
두 아들의 효심을 온 백성이 본받도록 했답니다.
그 때부터 사람들이 이곳을 효잣골로 부르다 지금의 '효자동'이 됐답니다.
그아버지는 이미 효자로 책봉되어있었다지요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 효자로 나라에서
이곳에 붉은색 정려문이 2개가 세워졌다합니다
이자리가 그 쌍홍문 터입니다
바로 이자리입니다
이제 시위대를 가로질러 우리는
이제 통인시장으로 갑니다
통인시장은 일제강점기인 1941년 효자동 인근에 사는
일본인들을 위한 공설시장으로 조성된 시장이라지요
근처에 일본인이 많이 살고있기 때문이었답니다
그후 서촌이 관광으로 유명해지고
엽전을 이용한 마케이팅으로 무척 유명해졌다지요
통인시장과 붙어있는 효자아파트입니다
효자아파트는 근대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라라요
그 후 지어진 마포아파트도 이미 역사의 뒤로 갔지만
효자 아파트는 아직도 이렇게 있답니다
우리 학생들 진지합니다
전부 무등생이지요
이렇게 커플로 듣는분들도 계시고요
조금 떨어진곳에서 경청하시는분도 있네요
15분간 자유 시간이 주어졌읍니다
반대편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지요
많은분들이 이렇게
입에 뭔가를 넣으면서 나타납니다
시위를 하러오신분들도
출출하셨나봅니다
이제 다음으로 이동해야지요
다음은 효자 군인 아파트입니다
이곳은 자수궁터 라네요
지수궁이란
원래 태조와 계비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 무안대군 방번이 살던 곳이다.
무안군은 동생 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기고, 제1차 왕자의 난 때 죽임을 당했다.
그 후 자수궁에 세종의 후궁들이 모여 살았다.
이때부터 왕이 죽으면 후궁들을 거처하게 하고 '자수궁'이라고 했다.
이곳은 후궁들이 비구니가 되어 한때 여승방이 되기도 했단다
역사야 하던말던
우리는 시소놀이나 한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바라보면 보이던곳에는 벽수 산장이 있었답니다
벽수산장은 친일파 윤덕영의 저택이었다지요
그저택은 얼마나 커다랗고 웅장했던지
서울 어느곳에서나 볼수있었답니다
아파트 건너편 저쪽에 있었다는데요
그건물의 잔재가 여기저기 있었답나다
공무원아파트 맞은편 세종아파트입니다
이집 한구석에있는
이런 돌로 집이구성됭있었답니다
이런 돌로 집이구성됭있었답니다
엄청크고 화려했던 집이라지요
그리고 조금더요
단풍나무가 붉은빛을 발산하는 이계단위
윤덕영의 접이 살던 집이랍니다
도심속에 단풍놀이입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온통 단풍입니다
그단풍을 이용한 사진촬영입니다
이쁜얼굴이 더욱 이뻐보이지요
어둠속에 발견한 보석같읍니다
그모습은 남자분이라고 다르지 않읍니다
이제 집구경좀 해야지요
엄청큰 집이었네요
석가래및 장식좀보세요
얼마나 공을 드린집인지 알수있지요
아마 서울시에 기부 되었다지요
조금더 단풍을 즐기구요
단체사진도 찍었답니다
남의집 소실 집앞에서요
그렇게 역사는 진행되는거겠지요
수성공원으로 이동하는 언덕입니다
이언덕에 거대한 저택이있었답니다
지금은 부자집 저택들이 줄을서있지요
그래서인지 많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읍니다
빨간벽돌 담장에 햋빛을 보고
모델을 자청하십니다
저야 좋치요
이쁜 그림 볼수있니요
담장이 길게 나오는 배경을 요구하십니다
한번 해봅시다
일단 이렇게
이건 어떠세요?
제가 아직 사진을 잘찍지는 못해서요
담쟁이단풍 앞에 미인들 줄을 서셨네요
1번 지나구요
2번입니다
그리고 3번아가씨이구요
아까 그건 셀카찍는 모습이네요
4번 모델입니다
각도를 다르게 해보았읍니다
이렇게 한장더요
그리고
잠시 인왕산에대한 설명이 있겠읍니다
원래 산이름이 없었다지요
조선 개국때에는 서봉이라 했답니다
경봉궁 서쪽에 있어서지요
이산을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다.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고 한다.
서울성의 내사산(낙산, 남산, 백악산, 인왕산) 중 하나이다.
중종때 중국에서 사신이옵니다
중종은 사신을 크게 우대하는 의미로 산이름 하나 지워주길 부탁했다죠
산이 오른쪽 임금을 보필하는 산이다 해서 필운산이란 이름을 받았답니다
필운산이름을 쓰는 사람은 별로 없지요
동네이름이 필운동이된이유이겠네요
여기 자유인이 있지요
너네들은 설명을 하던 말던
낭 앉아서 내일만 햘꺼다
수성공원으로 갑니다
가는길에 우리의 눔길이 머무는곳
이번에는 은행입입니다
이게 무두 돈이라면?
수성동 계곡입니다
단종 즉위 후 둘째 형인 수양대군과 권력다툼을 벌였으나 계유정난으로 희생당했다.
세종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이다. 큰형은 문종이고
둘째 형이 세조이다.
1428년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450년 문종이 즉위한 뒤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등장했다.
1452년 단종 즉위 이후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황보인,
김종서 등 문신·학자 세력과 제휴하여 수양대군과 권력을 다투었으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등을 제거할 때,
안평대군도 반역을 도모했다 하여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귀양지에서 죽었다.
이곳수성동 계곡의 상징이지요
돌다리 이름은 기린교이구요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그기린교는 나와있지요
청계천의 발원지이지요
인왕산 바위틈에서 생긴 물들이 이곳 수성동 계곡에서
드디어 개울이 되어 청계천으로 흘러갑니다
수성동 계곡은 행정구역이 옥인동입니다
수성동의 물은 옥류라 한다지요
그 옥류와 인왕산의 인자가 만나서 옥인동이 되었답니다
그곳에는 옛날 시민 아파트가 있었다지요
와우 아파트를 아십니까?
70년대 주택난을 해결하기외해서 서울 곳곳에 시민아파트를 지었지요
없는 재정에 빠른 성과를 내야하므로
졸속시공이 되었지요
물론 철근 이나 시멘트를 빼돌려 부실시공이 되었구요
결국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었답니다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는데
여기는 흔적을 보관하고 있네요
역사문화 탐방이 점점 열기가 세지고 있지요
잠시 모임을 소개하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꼭 국어시간에 산수공부하는 학생이있지요
이분은 자기 자태를 남기기 여념이 없으십니다
여기도 공부는 전혀 상관이없으시네요
이분만 열심이십니다
이제 자기소개의 시간도 끝나고
수성동 포토존으로 갑니다
인증들 하시라구요
주변은 가을과함께 저녁도 찾아오는듯합니다
이제 인증이 시작됩니다
최연소 이쁜이부터 인증합니다
정말 똑똑하게생겼지요?
이분들은 왜 이러는 겁니까?
우리 선생님 차마 눈을 못뜨고 계시네요
여유있는 표정도 몇장 남겨주시구요
저도 수성동 계곡 인증에 참여합니다
인증 성공
어 이분들?
뒤에 사모님 계신데요?
"낮설다" 무서운 목소리가 들리네요
멋진 사진으로
사모님 화를 푸시게 하십니다
윤동주 하숙집으로 이동합니다
윤동주의 대표시 서시를 낭독합니다
박노수 가옥이네요
오성과 한음은 조선 선조 때 명신으로, 어려서부터
친구로 지내면서 장난이 심하고 기지가 뛰어나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몇 개의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오성의 담력 : 한음으로부터 한밤중에 전염병으로 일가족이 몰살한 집에 시체 감장을 부탁받은 오성이
혼자 그 집에 이르러 시체를 감장하다가 갑자기 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며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였는데, 알고 보니 시체인 체 누워 있었던
한음의 장난이었다는 것이다오성의 아버지는 오성의 담력을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외딴 숲 속의 고목나무 구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
오라고 시키고, 먼저 가서 나무 구멍 속에 숨어 있다가 오성이 구멍 속으로 손을 넣을 때 안에서 그의 손을 잡았는데, 오성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체온이 느껴지자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장난임을 알았다는 것이다② 오성에게 똥을 먹인 한음 부인 : 오성이 한음 부인과 정을 통하였다고 한음에게 말하자, 이 말을 들은
한음 부인은 오성을 초청해서 떡에 똥을 넣어 오성에게 먹이고 거짓말을 하는 입에는 똥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③ 오성의 선보기 : 오성은 신붓감을 선보려고 인절미를 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몽둥이로 자기를
쫓으며 때리라고 시킨 뒤 도망치는 체하며 신부의 치마폭 속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선을 보려면 겉선이나 보시지 속선까지
보십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④ 한음의 참을성 : 오성은 우연히 도깨비를 만나 장차 정승까지 하리란 예언을 듣는다. 그리고 한음에게
변소에서 자기는 불알을 당기는 도깨비를 만나 예언을 들었다고 하며 변소에 가서 앉아 있어 보라고 한 뒤 노끈으로 한음의 불알을 매어
당겼다한음이 아픔을 참고 견디자 정승까지 하겠다고 말한 뒤 한음에게 변소에서 일어난 일을 본 것같이 말하였다.
이에 한음은 비로소 오성에게 속은 줄 알았다는 것이다⑤ 오성과 대장장이 : 오성은 어려서 대장간에 놀러 다니면서 대장장이가 만들어 놓은 정(釘)을 하나씩
궁둥이에 끼어다가 모아 놓았다. 정이 하나씩 없어지자 대장장이는 오성의 장난인 줄 알고 불에 달군 정을 맨 위에 놓아 오성의 볼기짝을 데이게
하였다. 뒷날 대장장이가 곤궁하게 되자 오성은 모아 놓았던 정을 도로 주어 곤궁을 면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P>
<P class=desc_section>⑥ 권율과 오성 : 오성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집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율
집에서 차지하자, 오성은 권율이 있는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이 주먹이 누구 주먹이오?” 하고 물었다. 권율이 “네 주먹이지 누구
주먹이겠느냐.”라고 말하자 감을 가로챈 일을 추궁하였다는 것이다.</P>
<P class=desc_section>이 밖에도 오성과 부인이 서로 골탕 먹이는 이야기 등이 많이 있다. 「오성과 한음설화」는 어린이들의
기지와 해학을 통하여 인간의 약점과 인간의 본성을 신선하게 조명한 우리의 귀중한 해학 문학으로서 가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