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종현의 역사문화탐방 오대산 선재길 편입니다
이상한 매력이있지요?
사실 일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갈수 있을지를 많이 망서렸답니다
그래도 참석하고 싶어서 계획을 조정해서 겨우 틈을 내고
참여할수 있었답니다.
그놈의 인기는?
꼭 여자한테만 있지요
이번에는 더욱 진가가 80%가 여성분이지요
목발만 안집었지 다리병 환자도 있더라구요
부럽습니다
월정사 입장료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지요
너무 철저하게 너무 악착 같이 징수하기 때문이지요
그리 늦은시간도 아닌데 차량이 많이 밀리는 이유는
입장료를 받느라 그렇답니다
오늘 트랙킹은 일주문 앞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거기가 전나무 숲이지요
전나무 숲을 지나면 월정사 경내입니다 경내를 살펴보고요
그다음은 바로 선재길입니다
선재길은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약9Km입니다
오대천을 끼고 약간의 오르막 경사길이지요
쉬엄 쉬엄간다고 했는데 무지 길지요
단풍도 보고 계곡도 보고 지루하기도 하고요 힘도 들었답니다
그리고는 상원사로 가서 트랙킹을 끝냈답니다
이것 보세요 12Km가 넘었지요
해설 듣는 시간이 있었지만
5시간20분 이나 걸렸답니다
트랙킹길이라 쉬울 줄알았다가
결론은 많이 힘들었답니다
먼저 오늘의 주인공을 소개합니다
정말정말 인기가 많으신 분이지요
물론 종현교 교주이시고요
특히 여자만 좋아하시는 분이시지요
오늘도 명 해설 기대합니다
월정사 일주문입니다
본래 일주문이라는 말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사주(四柱)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있다.
월정사 일주문의 기운찬 편액 글씨는 상원사를 한국전쟁 때 지켜낸
한암 스님의 제자로 월정사를 중흥시킨 탄허 스님의 글씨입니다.
늘하는 행사이지요
기념 촬영입니다
저는 이때 꼭 이들을 찍습니다
이분들은 사진에 잘안나오거든요
일주문을 통하여본 다른 세상입니다
부처님의 세상?
그곳에는 아름들이 전나무가 가득합니다
월정사엔 왜 전나무 숲만 있을까?
조선시대 소나무는 주로 궁궐 건축이나 선박 그리고 죽은 자의 관을 만드는데 쓰여 늘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소나무는 주로 공물로 나라에 바치게 되고, 절을 수리할 때 쓸 나무는 늘 부족했다.
조정에선 소나무의 벌목과 훼손을 방지하는 봉산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해 건축에 쓰이는 곧게 자란 소나무를 구할 수 없자,
절에선 건축목재로 쓰일 곧게 자라는 전나무를 선호하게 됐단 설명이다.
또 어떤 학자는 곧게 자라는 전나무를 소나무 대체재로 사용할 수 있어,
공물로 관아에 납품했기 때문에 전나무숲을 조성했다고도 주장한다 합니다.
시원시원하지요
다리가 짧은 제가 볼때에
정말 부럽기만 합니다
숲이 높고 깊어서 하늘이 안보입니다
정말 오래동안 지켜온 전나무숲의 위용입니다
조형물도 있네요
그냥 숲길을 걸어도 행복한데요
같이 가시는분과 대화 주제가 떨어질까?보아서
이런 조형물을 만들어 놓으셨지요
대화를 연결하라구요
무슨 형상일까요?
배를 타고 떠나는 연인?
잠시 조형물을 감상해봅니다
"고려 말 나옹선사가 매일 상원사에서 적멸보궁으로 올라 부처님께 콩비지를 공양했다.
어느 한겨울 콩비지를 갖고 내려가는데 소나무 가지 위에서 떨어진 눈이 콩비지를 덮친다.
나옹선사는 '이 소나무야, 너는 어찌 부처님 진신이 계신 이 산에 살며
큰 은혜도 모르고 어찌 부처님께 올릴 공양을 버리게 했느냐?'고 소릴 치자,
그 소릴 들은 산신령이 소나무에게 벌을 내려 이곳에 살지 못하게 하고,
전나무 9그루에게 '산의 주인이 되어 번창하라'고 명하면서부터
오대산엔 전나무가 주인 노릇을 하게 됐다"는 전설이다.
그래서 오대산에는 소나무가 없다나요
성황각이 이지요?
성황신앙은 중국 송나라 때 유행해 고려 문종 때 국내에 유입됐다.
고려시대엔 성황신께 올리는 제례를 국가가 주도했다.
조선 전기까진 고려와 마찬가지였지만,
중종 이후 사림파(성리학자)들이 득세하면서 성황신앙은 음사로 치부되어
국가의 제사 대상에서 제외되었답니다.
이후 성황신앙은 급격히 민간화가 촉진되면서 민간신앙으로 자릴 았다지요
그것이 동네마다있는 성황당이 되었답니다
서낭당은 성황신께 제를 올리는 제단이었다.
서낭당과 성황당이 혼용되고 있지만 비슷하다고 보면 90%는 맞는 얘기다.
조선 중기 이후 성황신앙은 무교와 함께 미신으로 몰렸지만
민간에선 더욱 승승장구하며 마을 신앙으로 자릴 잡았다.
그러나 해방 후 기독교 문화와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성황신앙(서낭신앙)은 몰락을 맞는다.
어느 문화가 들어와 500년이 되면 우리 것이라고 했는데, 이리 맹폭해도 되는 건지.
숲을 자세히 살펴보면요
보물찾기하듯 나무를 이용한 조소 작품들이 있답니다
이숲을 관장하시는 분들의 배려이겠지요
이가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는데
고정도 배려는 필요하겠지요
입장료도 냈는데요
인공적 작품도있지만
자연이 주는 작품도 있답니다
나무의 수명은 얼마나되는지 모르지만
사람도 태어난 순서대로 죽지는 않지요
꽤 나이가 드신분이 저세상으로가시면서
멋진 작품을 남기셨네요
자연의 작품은
보는 작품도 되지만 이렇듯 놀이터도 됩니다
놀이는 애들만 하는게 아니지요
이런 멋진 사람들도 놀이를 즐기고있답니다
지금 여러분이 걷고 보고계신 이길은
전나무(Fir Trees)숲길 입니다
또다른 고목이
다른 작품을 보여주고있지요
길따라 왼쪽으로 돌들이 박혀 있지요
일정한 간격으로요
뭘까요?
자연석은 아니네요
가로등? 발밑을 비추어주는 등입니다
월정사의 배려입니다
야간에 발밑에서 비추는
은은한 불빛을 상상해봅니다
지금 우리는 오대천을 따라 걷고 있읍니다
멋진 오대천의 모습이 주변의 숲들과 어울려
더 멋진 모습을 연출하고있지요
아직은 성질급한 놈들만이 옷을 갈아입고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붉은색을 많이 기대하고 있는데요
월정사 바로앞에 금강교입니다
공식적으로 전나무숲은 끝났구요
이곳부터는 월정사 경내라고 보아야합니다
우리 세르파님 금강교 밑 용소에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용소는 용이 놀수있을정도의 크기를 가져야 된다지요
용소라는 이름을 가졌다면
옛날에 기후제를 지냈던 곳이라 보면 된답니다
잘생기신분인데요
무척 열심히 경청하고 계시지요
우리모두 이런자세로 오늘을 대하고있지요
믿사옵니다
교주님!
이제는 월정사입니다
우서 사천왕문입니다
사천왕은 천상계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는
사천왕천(四天王天)의 동서남북 네 지역을 관장하는 신화적인 존자들로서,
우리나라의 천왕문내에는 동방 지국천(持國天)이 검(劍)을,
북방 다문천(多聞天)이 비파(琵琶)를,
서방 광목천(廣目天)이 탑을,
남방 증장천(增長天)이 용을 쥐고 있는 무서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출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수호신들에 의해서
도량 내의 모든 악귀가 물러난 청정도량이라는
신성관념을 가지게 하려는 데도 뜻이 있답니다.
월정사는요
빨간 단풍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반갑습니다
이런 청초한 모습으로 맞이하는
단풍도 있지요
역시 반갑습니다
절에는 문도 참 많지요
보통 절에는 금강문이 있고요 법당으로 들어가는 2층집 누각이있답니다
월정사는 금강문과 누각을 같은 건물로 합쳐 놓았습니다
금강문은 사찰의 수문장 역할을 하는 금강역사상(인왕상)을 문의 양쪽에 배치한다지요.
보통 사찰문 왼쪽에는 밀적금강,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이 서 있답니다다.
여기도 그렇습니다
보통 루(樓)각은 2층다락집형태로 부처님을 모시는 중심법당이 마주보는곳에 위치합니다
어두운 누각 그늘을 지나 밝은 법당 앞으로 나아가는것은 부처님의 자비 광명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이지요
누각의 높이를 낮게하는 이유는 부처님 앞에 저절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라는 의미랍니다
이제 경내입니다
경내는 온통 석조물(불교)의 전시장입니다
이곳저곳각종 조형물이나
불상들이 눈을 즐겁게/
아니면 불심을 북돋게하려 세워져겠지요
일종의 불상 전시장 같은 느낌이지요
어째든 눈은 즐겁습니다
월정사하면 국보인 팔각 9층석탑이 제일이겠지요
이 석탑은 상하의 균형을 얻었고 조법(彫法)이 착실하여 고려시대
다각다층석탑(多角多層石塔)의 대표가 될 만하다지요.
현재 이 석탑 앞에는 석조보살좌상(石造菩薩坐像, 보물 제139호)을 안치하여 공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석조보살좌상은 현재 설치되어있는것은 모조품이며 진품은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있읍니다
탑은 stūpa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탑파(塔婆)의 준말이랍니다.
스투파는 ‘유골을 안치하고 흙이나 돌로 높이 쌓아 올린 무덤’이라는 뜻이라지요
원래는 유골을 안치한 것을 탑이라 하고, 안치하지 않은 것을 지제(支提,
ⓢcaitya)라고 했으나 보통 구별하지 않고 모두 탑이라 한답니다
스님들의 사리를 넣어둔다는건 무덤과 같은 이치이지요
자가가 존경했던분의 무덤을 더크고 화려하게 꾸미고 싶은게 일반 이겠지요
그래서 탑을 더 멋지고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은게 모시는분 심정이지요
꼭데기에 장식도 달구요
그런 탑이라면 소원도 많이 들어주겠지요
우리는 이럴때 소원을 빕니다
주변에는 각종소원이 들어있네요
모두들 들어주실겁니다
탑앞에는 적광전 이란 건물이 보이지요
원래 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건물을 말하지요
적광전 또는 대적광전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해인사의 대적광전도 있잔아요
법당을 더욱 자세히 보고요
부처님 보려구요
유리문 사이로 안을 들여다 봅니다
어라 부처님이 석가모니 상이있지요?
그러면 이름이 대웅전이어야 되어야하는데?
궁금할까보아서
안내를 해놓았네요
그런데 읽어보아도 영~~
그냥 탄허스님이 그렇게 정했답니다
월정사는 더이상 ~~
이제 월정사를 뒤로하고 순례자의 길을 떠나볼까요
월정사에선 선재길을 사색과 명상의 수도자의 길이라고 했다.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 사이 오대천변을 따라 이어진 약 9.5km의 숲길이 바로 선재길이다.
선재길 이름은 문수보살의 깨달음을 좇아 구도자의 길을 걸은 선재동자에서 비롯됐다.
선재동자는 불교 경전인 '화엄경'에 나오는 모범적인 구도자이란다
예부터 스님들은 선재길을 일컬어 '자아를 발견하고 해탈의 경지에 다가갈 수 있는 수행자의 길'이라고 여겼다.
1960년대 말 현재의 도로가 생기기 전 많은 스님과 신도들이 월정사와 상원사를 선재길을 따라 왕래했고
또 이곳 화전민들의 애환이 담긴 길이었다.
월정사에서 오대천을 따라 선재길을 걷다보면 오대천변에 부도밭이 보인다.
월정사 고승들의 무덤이다.
그런데 왜 월정사 입구에 부도밭을 조성하지 않고 오대천변에 만들었을까?
그 이유를 들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름철 장마가 시작되면 오대천에 홍수가 나서 범람한 물이 월정사를 들이쳐 절이 물이 잠기자,
고승대덕들의 도력으로 계곡의 범람을 막고자 이곳에 부도밭을 마련했다고 전한다.
너무 공부만 했지요
같이 가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한장 남겨드립니다
경치와 아주 잘 어울리시지요?
자아를 발견하고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수있는길입니다
여기를 찾은 이많은 사람들도 그런 생각이 있겠지요?
조금이라도 배우고 갔으면 합니다
그들중에는 이렇게 머리에 모자를 올리고
수행의 길을 가시는 스님도 계시고요
엄마따라 무장정 경치를 즐기는 어린 소녀도 있구요
그리고요 원색의 풍경만 보면
무조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중년의 여인도 계십니다
오래 간직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화려한 색보다
이렇게 무채색에서 더욱 아름다움을 느끼기도하지만
그래도 우리 범인들은 화려함에 환호하고 갈채를 보내곤하지요
여기는 어린 전나무들이 빽빽하네요
나무도 수련을 하는듯하지요
문수도량에서 많이 배우고 커다란 나무가 되길 기원합나다
시간이 점심을 알립니다
갈길은 멀고요
사실 많은사람이 같이 식사를 할장소가 앞으로는 없거든요
적당히 하지만 많이 해결합니다
이곳은 회사거리 앞입니다
세르파님들이 기념사진을 찍으시네요
우리를 케어하려 힘드셨을텐데요
이렇게라도 맘껏 즐기십시요
이곳 이름이 회사 거리라 한다지요
화사거리?
이리루 출근을 한단 말인가요?
일제 강점기시절 이곳에 제재소 공장이있었답니다
여기서 나무를 모우고 가공해서 밖으로 송출했다하지요
그래서 이곳이 회사거리가 되었답니다
적당한 크기의
너와집도 전시해 놓았지요
앙증스럽니요?
다시 즐기자구요
2사람이 똑같은 포즈를 취했는데요
뒷사람은 하나도 안보이지요?
왜일까요?
서로 작품을 버렸다고 할까보아서요
다시 각도를 바꾸어보았답니다
괜찬은가요?
오늘이요
단풍만이 우릴 기다리느게 아닙니다
오대천 저 멀리 보이는 가을하늘입니다
정말 멋지지않읍니까?
난 좋은데요
오대천 따라흐르는 맑은물
고도가 높아질수록 나무들이 자꾸 색을 변해가네요
그만큼 눈은 커지고요
그런 반면에
여기요?
화전민이 살던곳이랍니다
어떤 삶?
얼마나 어려었으면 사람들을 떠나 이깊은 산속으로 왔을까요?
그 삶은 흔적입니다
다시 진행하는길
멋잇다고 생각되어 이쁜 아가씨 모델을 삼았는데
그때 그기분보다는 덜하네요
그래서요
혼자보다는 둘이 낳지 않나요?
네 좋아보입니다
계속해서 선재길을 즐기고 있읍니다
계곡도 즐기구요
단풍도 즐기구요
때로는 인간이 만들어논 조형물도 바라봅니다
또 같이 걷는 일행의 모습도요
선재길을 지루하다 싶이 가고있읍니다
저기 자연스러운 다라가 보이지요
섶다리입니다.
옛날엔 범람이 잦은 오대천에 매년 사라지면 다시 놓곤 했던 임시다리였다.
'섶'은 푸른 솔가지나 작은 나뭇가지를 말한다.
나룻배를 띄울 수 없는 작은 하천에,
잘 썩지 않는 물푸레나무나 버드나무로 다리 기둥을 세우고,
소나무나 참나무로 다리 상판을 덮어 그 위에 섶과 흙을 다져 어설픈 다릴 만들었지요.
여름 장마가 시작되면 홍수로 금방 떠내려 가는 바람에 '이별다리'로도 불렸답니다.
나름 낭만이있지요?
아휴 힘들다!
이제 다왔나 봅니다
여기가 상원사 주차장이지요
오늘 산행을 가볍게 보아서인지 꽤 힘드네요
오대산은 주봉인 비로봉을 비롯해 동대산,상왕봉,두로봉, 호령봉의 5봉우리가 있는산으로
마치 연꽃 모양을 하고있으며 그가운데에 속하는 절이 오대산 문수성지 상원사입니다
신라 성덕왕이 되는 효명태자가 건립했다고 전해지고있구요
뒷편에 5대 적명보궁 중에 하나인 상원사 적멸보궁을 가지고 있는 천년사찰입니다
오늘 저와 버스에서부터 쭉 같이다니신분이다
상원사 기념하여 한장 인증해 드립니다
반가왔읍니다
그리고 입구 왼쪽에
요런 모양의 석물이있읍니다
이름은 관대걸이라 합니다
심한 피부병에 시달리던 세조가 이곳 오대산을 찾아 목욕을 했다네요
그때 계곡에 들어가기전에
관복을 볃어 걸어놓았던곳이 관대 걸이라 한답니다
그것에대한 설명입니다
이계곡 안으로 들어가면 세조가 목욕을 했다는 장소가 있답니다
그리고 상원사로 향합니다
상원사 계단을 오르기전 오른쪽입니다
삼화상부도전이랍니다
6.25때 사찰이 적의 근거지가 될것을 우려해서
국군에 의해 월정사를 비롯해 오대산 일대의 절들이 불태워 졌답니다
그때 "나도같이 태워라"라며 상원사 법당에 앉아 끝까지 절을 지킨 스님
그에감복한 국군 지휘관은 법당 문작만 태움으로 상원사를 지켰다지요
바로 그스님이 한암대종사 랍니다
한암을 비롯해서 만화당, 탄허스님등의 부도전입니다
다시 상원사로 오르는 계단입니다
계단이 상당히 가파르지요
"번뢰가 사라지는길"
너무 힘들어서 번뢰가 있을리가없겠네요
그계단 끝이
상원사의 2층루가 청풍루입니다
그 청풍루 누각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면
부처님의 나라 빩은 세상이 열리게되지요
전면에 돌탑과함께 상원사의 대표건물 문수전입니다
일단 인증부터합니다
오늘 동지이시지요
우선 먼저 해드리구요
저도 문수전 앞에서 건방진 폼으로 인증했읍니다
그리고 주변의 화려한 연등앞에서요
인증에는 남녀가 따로 없지요
이제 경내구경을 해야지요
일단 국보인 동종부터 만나봅니다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종 국보랍니다
"동정각"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지요
글씨는 탄허스님 글씨랍니다
가운데 유리로 보호되고 있는종과 오른편의 또하나의 종
그리고 왼편의 석조 조형물이 놓여있지요
유리안에 보호되고있는종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인
국보 제16호 오대산상원사동종 진품입니다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성덕대왕 신종보다 45년이아 앞선 신라 선덕왕 24년(725)에 제작된
이동종은
당초 안동 대도호부 누각에 걸려있던것을
왕명에 의해이곳으로 이전되었다고 합니다
보호를 위해 유리벽으로 보호하고
타종을 하지않으며 오른편 모조품을 타종한다지요
왼쪽의 석물입니다
그동종에 있는 비천상을 돌에 옮겨 놓은겁니다
구름을 타고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상입니다
이종은 모조품 종입니다
진품을 대신해서 소리를 내주고 있지요
동종의 용뉴입니다
옛날 용신의 아홉아들중에 포뢰라는 용이 있었는데요
ㅇ렁찬 그 울음소리애 산천이 흔들리고바다가 뒤집어 질정도로 우렁찼다네요
그후로 사람들이 종을 만들때는 종의 머리위에 포뢰를 만들어 올렸답니다
상원사 동종은 조선 태조 때 안동 남문루로 옮겨진다.
그러다가 세조가 상원사 중건하며 "제일 아름다운 종소릴 가진 동종을 상원사로 옮기라"고 명하면서
다시 안동 남문루에 걸린 동종이 1469년에 이곳으로 오게 된다.
동종이 이곳으로 올 때 안동과 쌓은 그 동안의 정을 잊지 못해, 죽령에서 움직이질 않자
동종에서 종유를 하나 떼어내 안동 남문루 아래 묻으니 그제서야 동종이 움직였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그 만큼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는 얘길까?
그때 떨어진 종유가 지금도 없는대로 남아있지요
이제 다시 문수전 쪽으로 가봅니다
문수전 계단아래
오래된 석상 2점이 보이시지요
'고양이석상'입니다.
문수전에 들어가려는 세조의 곤룡포를 잡아당겨 수미단 아래 숨어
세조의 목을 노린 자객들로부터 세조의 목숨을 지켰다는 고양이들이다.
이 고양이들의 공으로 상원사는 '고양이를 잘 보살피고
또 고양이가 죽으면 제사를 지내라'는 목적으로 묘전(고양이 밭)을 하사받는다.
그 후 궁으로 돌아온 세조는 서울 근교 사찰에도 "고양이를 잡아 죽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명을 내렸다지요.
그래서 절에는 고양이가 많이 살고있군요
법당안의 문수동자상과 문수보살상입니다
심한 피부병에 시달리던 세조는 오대천 계곡에서 목욕을 했는데
마침 지나가던 동승을 불러 등을 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네요.
목욕을 끝낸 세조가 동승에게 "그대가 임금의 등을 밀었다고 말하지 말라."라고 당부를 하니
동승은 "왕께서는 문수보살을 만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 후로 세조의 몸에 난 종기가 씻은 듯이 낫게 되자
감격한 세조는 나중에 화공을 불러 문수 동자의 모습대로 조각하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상원사 문수 동자 상이라고 합니다.
목조문수동자좌상은 국보221호입니다
세조가 피부병이 낫게되자
화공을 불러 문수동자의 그림을 그리게한후
조각했답니다
당간지주 위에 황금봉황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고 있읍니다
당간지주는 사찰을 표시하는 깃발을 거는 것인데요
이곳 상원사 당간지주는 봉황보당이라 부르며
세조가 상원사를 찾았을때 어룡기를 걸었던곳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왕을 상징하는 의미로 조성했다 합니다
여왕마마가 납시었나요?
멋지고 잘 어울립니다
다른 방향에서 봉황을 감상하시지요
저 푸른하늘로 하염없이 오를 기세입니다
그외에도 상징적인
조형물들이 보입니다
꼭 소나기에나오는 산골소년이
저멀리있는 동자승과 물길을 통하여 대화하는듯합니다
아! 물고기가있네요?
시주? 방생?
알수없지요
아이 참!
그냥 산골소년할래요
풀입새 따다가
역었어요
그대 노을빛 곱게 물드면
예쁜 꽃모자 쒸워주려고~~
오대천은 오대산 서대 수정암(옛 염불암) 옆 우통수에 발원한 물을 받아 한강으로 흘러간다.
우통수는 1987년 이전엔 한강의 발원지로 널리 알려진 우물이다.
그러나 국립지리원이 다시 측정한 결과 태백산 금대봉 검룡소가 우통수보단 조금 더 멀리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한강의 발원지가 바뀐다.
하지만 우통수는 존재한다
우통수는 속리산 삼타수, 충주 달천수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좋은물에 들어간다지요
특히 우통수는 물분자가 무거워 깊고 물가운대로 만 흘러간답니다
그래서 옛날 한강의 중심으로 흘러가기에
겨울에 그얼음을 동빙고, 서빙고에 보관 하여 사용했다하지요
우통수라는 글이 보이네요
여기가 발원지?
우통수 한잔식 시식해봅니다
맛이요?
그냥 물맛입니다
춥네요
이제 볼것도 다보았구요
해설도 끝났읍니다
내려가는길
단풍이 눈에 가득 들어옵니다
올여름 그리 더웠었는데요
단풍이 드네요
이렇게해서
천년고찰 상원사 탐방을 마칩니다
우리버스는 저기 아래있지요
눈치빠른 우리 교주님 신도들을 위해 버스를 호출합니다
잠깐 기다리고 오늘 선재길 역사 탐방이 끝나는거지요
짧지 않은 선재길입니다
천년동안 얼마나 많은 수행자들이 이길을 다녔을까요?
현대를 사는 우리는 수행이나 깨달음보다는
가을 단풍경치를 더 기대하고 왔는지 모르겠읍니다
하지만 그단풍도 선재길의 의미를 보러 오라는 초대장이겠지요
그런데요 단풍이 아직 덜 영그렀지요
조금의 아쉬움도 있지만 그역시 배움의 연속 일겁니다
적당히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계절
우릴 이런 좋은길로 안내하시고
힘들지 모르고 설명해주시고
항상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종현교 교자가 아닐까요?
고마움의 표시로
"전종현의 역사문화탐방" 영원하라!
이렇게 외쳐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