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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2018.10.03.남한산성

 

정축하성(丁丑下城) 

북풍한설이 몰아치던 1636년 병자년 12월 모일, 몇 일째 제대로 먹지 못한 남한산성 내

조선의 군졸들은 꽁꽁 얼어버린 성벽에 붙어서서 한줄기 햇빛에 기댄 채 언 몸을 녹인다.

짚신 안 구멍 뚫린 버선 속에 노출된 발가락들은 동상에 걸려 썩어간다.

군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전쟁은 백성들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중국을 할아버지로 모시는

배 부른 왕과 양반사대부들을 위한 전쟁이다.

언 손에 쥔 창과 칼이 추위로 인해 쩍쩍 눌러붙을 때마다 병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른다.

1636년(인조 14년) 12월 15일(이하 음력), 인조의 몽진길이 얼마나 급했던지

시체나 드나드는 광희문(시구문, 수구문)을 나와 남한산성의 남문을 통해 행궁으로 들어간다.

12만 명의 청나라 군사들은 곧 산성을 포위했고,

남한산성 내엔 1만 3천 명의 조선군사가 30일 동안만 먹을 군량미 밖에 없었다.

대치상태가 길어지자 굶주림에 지친 무장들과 병사들은 척화파 대신들만 보면 잡아 죽일 태세였다.

마침내 45일 만인 1637년 1월 30일 새벽,

인조는 청나라 신하의 관복인 남색 융복을 입고,

임금의 출입문인 남문이 아닌 서문을 통해 남한산성을 내려간다.

청태종 홍타이지가 높은 곳에 앉아 내려보는 삼전도 수항단 아래서 청태종을 우러러보며

삼배구고두례(한 번 절할 때마다, 이마를 땅에 세 번 찧는 행위를 세 번 반복하는 항복의례)를 올렸다.

그날의 항복이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조선왕조실록엔 짧게

'정축하성(정축년에 성을 내려가다)'이라고만 기록했다.


역사를 아는지? 세상을 아는지?

들꽃은 이곳에서도 자기맡은 바 임무에 충실한다

09시 남문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뒤에 오시는분을 기다렸다

왠차가 이리도 많은지 주차장을 구하지못해서

인근 식당에점심먹을 약속을하고 주차하고서는

남문부터 구경하고져 한다

이곳 산성의 커다란 의미와 다를수도있눈

남문 가기전에 비석군단이 눈에 들어온다

비석숲으로 표기되어있지요

뭔비석이냐구요?

한개를 확대해봅니다

뻔하거지요

"어사 박지수"의 선정비 입니다

여기 30여개의 비석은 인근에서 방귀난 뀌었던 사람들의 공적비들입니다

자기야 이곳 재직시 잘먹고 잘살았겠지만

백성들이 정말 존경해서 만들었을까요?

그냥 그렇게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남한산성의 남문입니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곳에 있지요

그래서 사람의 출입이 가장 많은 곳 이기도 합니다

공식 명칭은 지화문(至和門) 화합을 이루는 문이라는 뜻이지요 

그 지화문에대한 설명입니다

인조가 피난올때 들어왔던 문이라지요

남한산성 산책길 안내도이지요

오늘은 성곽을 따라 갈 예정입니다

북문까지요

지화문 홍예를 통해서 바라본 바깥세상입니다

작은 느티나무 한그루가  초가을 자기역활을 충실히 수행하고있네요

멋진 모습으로요


성곽쪽에서 바라본 지화문 전경입니다

성곽모습이지요

여러번 개축을 시행하여서인지

돌모양이 다른곳이 여러곳에 있네요

오늘 가운데 계신분 생일입니다

그래서 생일 축하겸 모였답니다

기념사진 초안이입니다

이렇게 찍어달라고 부탁했구요

제가 추가된 모습으로 이렇게 완성되었답니다

이제 출발합니다

오랜만의 산행이랍니다

유난히 힘들어 보이시는분이있네요

하지만 표정은 무척 좋아보입니다

그리고

멋진풍경이 멋진 사진 남겨드립니다

뒤에산이 청계산 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