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4월14일
오늘은 종현교 발상지인 서울 남산에서 성지순례가있는날이다
가는날이 장날이라했던가
전날까지 멀쩡하던 날이 새벽부터 눈물을 흘린다
모임장소인 동대입구역 6번출구로 가기도전에
먼저오신 장로님들이 일단 역안에서 대기를 권장한다
비오는 남산은 종현교 말고도 오늘 다른 사이비종교도 행사를 하는지
시끌벅적이다
모이는 시간이 다가오자
신도들 6번 출구로 나가고 계시지요
출구앞 정자는 비를 피하기 안성맞춤이지만
이미 다른 종교에서 점령하고 있어서
실짝살짝 접금만 하고있다
비는 우산이 막아주고 바람만이라도 피해보려는 심정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가 살해된 지 5년 뒤인 1900년 9월, 고종은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장충단을 꾸며 사전(祠殿)과 부속건물을 건립, 을미사변 때 순사한 장졸들의 영혼을 배향하여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처음에는 을미사변 때 전사한 시위대장 홍계훈(洪啓薰), 영관(領官) 염도희(廉道希)·이경호(李璟鎬)를 주신으로 제향하고 대관(隊官) 김홍제(金鴻濟)·이학승(李學承)·이종구(李鍾九) 등 장병들을 배향하여 제사지냈다.
그러나 ‘창선(彰善)·표충(表忠)의 일이 어찌 군인에게만 한할 것이랴.’는 육군법원장(陸軍法院長) 백성기(白性基)의 제청에 의해 다음해부터 을미사변 때 순국한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을 비롯, 임오군란·갑신정변 당시에 순의(殉義), 사절(死節)한 문신들도 추가, 문무의 많은 열사들이 장충단제향신위(奬忠壇祭享神位)에 포함되었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군악을 연주하고 군인들이 조총(弔銃)을 쏘았다. 그러나 1910년 8월장충단은 일제에 의해 폐사되고 말았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이 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으로 이름하여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하였으며, 상해사변(上海事變) 당시 일본군인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이토(伊藤博文)의 보리사(菩提寺)인 박문사(博文寺)를 건립하였다.
광복 후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되었다. 6·25전쟁으로 장충단 사전과 부속 건물은 파손되었으나 장충단비(奬忠壇碑: 서울특별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호)는 남아 있다. 이 비는 원래 영빈관 내에 있었는데, 1969년 지금의 수표교(水標橋: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서편으로 옮겼다.
비의 ‘奬忠壇(장충단)’ 세 글자는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쓴 글씨이며, 뒷면에는 민영환(閔泳煥)이 쓴 143자의 찬문(撰文)이 새겨져 있다. 정부수립 후 장충단공원 경내에는 여러 공원시설이 들어섰다.
길이 27m, 너비 7m.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원래는 현재의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에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았다. 이때 다리의 서쪽에 있었던 수표석(水標石)은 홍릉의 세종대왕기념관에 옮겨졌다.
1441년(세종 23) 수표(水標)를 만들어 마전교(馬廛橋) 서쪽에 세워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여 홍수에 대비하였다. 수표가 세워지기 이전에 이곳에 우마시전(牛馬市廛)이 있어 마전교라 불리었는데, 그뒤 수표교라 바뀌었고 이 일대 동네를 수표동이라 하였다.
마전교는 1420년(세종 2)에 놓아졌는데 ≪동국여지승람≫ 교량조(橋梁條)에는 수표교로 되어 있다. 화강석을 깎아 만든 석재(石材)를 가구식(架構式)으로 짜맞추어 세운 돌다리이다.
기둥의 아래는 거칠게 다듬질 된 네모난 돌로, 위는 고르게 다듬은 네모난 돌로 만들어 2단으로 포개어 쌓았다. 이 가운데 위 4각주(四角柱)는 물의 흐름이 유연하도록 모서리를 물의 방향에 맞추어 배열하였다.
모두 9줄 5열로 배열한 돌기둥 위에는 양 끝을 반원형으로 다듬은 굵고 긴 석재를 세로로 걸쳐놓았고, 그 위에 바닥돌을 가로·세로로 짜맞추어 바닥면을 구성하였다.
바닥의 양쪽 언저리에 돌난간을 세웠는데, 한쪽마다 엄지기둥 11개를 세우고, 그 사이에 동자기둥 1개씩을 세워 6모로 된 난간석을 받쳤다. 난간을 구성하고 있는 부재는 연꽃봉오리·연잎 등을 모티프로 하여 설계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돌난간의 전형적인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1760년(영조 36)에 수리되었는데, 이때 다리 앞쪽 하천 바닥에 눈금을 새긴 돌기둥을 세웠다. 이 기둥에는 10척(尺)까지 눈금을 그어 불어나는 물의 양을 측정하게 하였다고 한다.
한편 교각(橋脚)에도 ‘庚辰地平(경진지평)’이라는 글씨를 새겨 수준(水準)으로 삼았다. 1406년(태종 6)에 인공으로 물길을 뚫어 만든 개천 위에는 돌다리 7개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수표교만이 남아 있다.
다리 곳곳에는 ‘丁亥改造(정해개조)’·‘戊子禁營改造(무자금영개조)’ 등의 글씨가 남아 있어서 500여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수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길을 건너는 통로로서뿐만 아니라 홍수의 조절을 위하여 수량(水量)을 재는 구실도 하였던 중요한 다리이다.
“남산 훼손, 산신이 노해 호텔 적자” 소문… 탑 쌓아 액땜
리움미술관은 입구 바닥에 기원문 적은 동판 깔아
한국의 대표적 고급 호텔인 서울 신라호텔엔 ‘비보탑(裨補塔)’이라 불리는 돌탑이 하나 있다. 무심히 지나치면 발견하기 어렵겠지만 눈밝은 이용객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찰의 일주문(一柱門)을 연상시키는 호텔 정문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구석에 어른 키만한 돌탑이 서 있다. 산길이나 옛 서낭당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돌무덤의 형태다. ‘나그네의 안녕’을 기원했던 전통적 돌무덤이 왜 5성급 고급 호텔 입구에 서있는 것일까.
발단은 남산 2호 터널이었다. 신라호텔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는 이 터널은 1971년 개통된 이후 1977년 재개통, 2001년 재재개통, 2005년 확대개통 등을 거치면서 덩치가 커졌다. 그런데 엉뚱한 소문이 생겼다. “터널이 확대될 때마다 호텔엔 적자가 생겼는데 그 이유가 남산 2호 터널에서 사기(邪氣)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소문은 엉뚱했지만 꼬리가 달려 있었다. “서울을 보호하는 산인 남산을 훼손해 산신(山神)이 노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 얘기가 은밀하게 하지만 빠르게 확산됐다.
▲ 신라호텔 정문 어귀에 세워진 비보탑. 돌무덤 형태인 이 탑은 산신이 노했다는 흉흉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세워졌다. (photo 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호텔 경영진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경영진에 묘수를 던진 것은 삼성그룹 고위층이라고 한다. 이 고위층은 “호텔에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비보탑’을 쌓아 민심을 진정시키라”는 아이디어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단순한 돌탑이었지만 효과는 만점이었다. 동요하던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이젠 돌탑의 존재마저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유사한 사례는 또 있다. 서울 한남동에 있는 삼성 리움미술관이다. 이 미술관 정문 입구 바닥엔 동판이 하나 깔려있다. 이 동판 역시 무심결에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눈여겨보면 다음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우리는 대지모신(大地母神)의 혜려(惠慮)에 힘입어 문화창달(文化暢達)을 위해 미술관을 세웠습니다.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이 일에 참여하였고 앞으로 참여할 모든 이들에게 기쁨을 내려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