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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5) 2017.11.11. 북한산 역사문화탐방


북한산은 정말 가까운 산이다

가까워서 그 만큼 또 많이 올랐던 산이지요

운동목적? 또는 친목강화? 그리고 심심해서

오늘은 아니다 

아니 늘 다니던 그 길이 아니고  구석구석을 돌면서 몰랐던

돌 하나를 보고 집터를 보고 설명을 듣고 머리 속에 넣어 보려고 하는 날이다

잘 들어 갈지는 모르지만

이름하여 "전종현의 블랙여크 역사문화 탐방"이다

사진은 북한산 청하동마을 입구 청하운동문 명각문 앞이다 

이제 시작입니다

09:00 에 만나기로 했지요

북한산성 버스정거장 옆 쉼터입니다

사람이 많지요

인기 절정입니다

오늘 이곳에서 같은 시간 2개의 모임이있었답니다

그래서인지 더욱 혼잡 스럽게 보입니다

첫번째 모임은

제가 참석하려고 신청한

블랙야크 역사문화 탐방입니다

매달 전국의 명산을 돌면서

그 곳의 문화재를 살펴보고

그 문화재를 역사적으로 해석하고

또 주최자인 블랙야크에서 선물까지주는 모임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서울등산학교의

무료 릿지교실입니다

저도 여기 몇번 참석한적이있지요

북한산의 험한코스 숨은벽, 염초봉, 만경대를 돌아가면서

무료로 체험시켜주는 모임입니다

물론 100산 인증시 북한산 인증을 이 모임을 통하여 염초봉으로

백운대를 인증하였답니다

나에게는 익숙해 보이는 모임입니다




두 모임에는 역시 칼리스마 넘치는 리더가 있다

이분은 역사문화탐방의 리더이시다

주옥 같은 역사 지식을 소유하고 계시며

정확한 해석과 재치있는 입담으로

리더를 떠나서 종현리즘의 창시자 시다

물론 여자들에게만 해당하지만

이분을 블랙야크 역사문화탐방 세르파라고 칭합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이분 역시 칼리스마하면 한가닥 하시는 분이다

풍부한 산악 경력을 소유하고 계시며

산중에서도 바위라면 누운바위 선바위를 가리지 않고

어떻게하던 올라가려는 본능을 가지신 분이고요

이를 일반인에게 전파하려고 노력하시는 선생님?

이분도 여자들에게는 무척 잘하십니다

그리고 이분의 직함은 교감선생님이시다



기 싸운이랄까요?

2개모임은 복잡한 속에서도

살짝 눈치보는 느낌도

그러나 자기 행사의 진행을 순서대로 추진합니다

분위기를 기념품 증정으로 시선을 집중시키고

서포터들로 하여금 흥을 돋구게 합니다

 릿지교실 역시 조금은 심기가 좋지 않은 표정이지만

예정된 수순대로 진행되어가고 있네요

지금은 교감선생님의 시범에 따라 체조가 진행중이지요

살짝살짝 눈치를 보는듯하지요

경쟁단체 비교는 여기까지....






그리고 단체사진과 함께 오늘의 역사문화탐방이 시작됩니다

자 정문을 향해 출발!

가는길입니다 정면에

노적봉도 보이고

만경대도 보입니다

북한산에는 봉우리가 참 많이있지요

그 많은 봉우리가 거진 이름이 다있답니다

숙종이 북한산성을 축조한 이후 북한산성엔 평시에도

정규병 천여 명과 승병 360여 명이 상주합니다.

군인이지요 군사 활동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면 훈련도 하고요 모임도 있겠지요

그러면 명칭이 있으면 편리하겠지요

그래서 지역마다, 봉우리마다 이름을 가지고 있나 봅니다 

종현교의 바이블인가요?

형광펜에 빨간글씨까지

시험보시나요?

공부 엄청하셨네요

교주님 좋아 죽습니다

이분입니다

종현교 교주는 전도사도 잘 구하셨네요

쭉쭉 빵빵에 미모도 한미모 하시네요

아마 전도사는 이 정도는 되야

종현교가 유지하는 이유일것입니다

아주아주 보기 좋읍니다

북한산 내 산성은 백제 초기부터 토성의 형태로 쌓습니다.

고려시대엔 토성을 석성으로 수축하고 중흥산성(중흥사 뒤편)이라고 했습니다.

고려 말 우왕 때 최영 장군이 요동을 정벌한 군대를 이곳에서 훈련시켰고,

위화도에서 회군해 개경으로 진격하던 이성계 군대와 이곳에서 일전을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숙종 땐 외침시 왕이 한양도성을 떠나 결사항전할 의도로 북한산성을 쌓습니다.

북한산성은 지금껏 남아 세월의 흔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번째 입니다

북한산성에는 문이 14개가 있읍니다

대서문 -서암문(시구문)-북문-백운동암문(위문)-용암문-대동문-동암문(보국문)-대성문-대남문-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가사당암문 등 12개문과 수문을 2개 가지고 총 14개 성문이 완성되었지만

숙종 방문후 대서문쪽의 보강 필요성 때문에 중성산성을 추가하여 중성문과 수문이 추가되어 총 16문으로 형성되었다



이곳 수문은 북한산성의 정문 역할을 하던 대서문과 연결됐는데,

북한산 계곡의 물이 빠지는 수구(水口)입니다.

수문은 1915년 대홍수에 돌과 장대석 등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유실됩니다.

수문 옆 선돌(입석 立石)엔 수문에 관한 기록이 암각됐는데 지금은 글자가 마모돼 흔적만 남았습니다.

남은 수문의 잔해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모두 유실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습니다

북한산 14성문중 하나인 수문입니다

그에 대한 설명문이구요

수문옆 입석입니다

엄청 큰바위 뭔가가 있을법하지요





수문에대한 글이 암각되어있는데

뭔말인지 모르겠네요

저기 언덕넘어가 산성의 대문인 대서문 입니다

성곽이 남아있지요



민공유서(閔公遺棲)

민공유서는 고려 충숙왕 때 재상 문인공 민지의 별서(별장+농장)터로 민지는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다고 합니다.

민공유서 터에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수문의 정비를 담당하던 절인 서암사가 들어섭니다.

그곳은 얼마 전까지 공터로 남아 산꾼들에게 체조장소를 제공했으나,

지금은 서암사가 다시 중건되려 합니다.


서암사에서 바라본 원효봉입니다

아래는 계곡이구요

위로는 북한산의 각종 봉우리가 보이는 명당입니다

잠시

종교행사 진행이있읍니다

커다란 무대위에 설교가 너무나 자연스럽읍니다

집중이 약할때에는

처방이있읍니다

퀴즈라는 형식을 빌어서요

상품을 줍니다

이분이 당첨되셨네요

야유가 쏟아집니다

수석 전도사인데

짜고하는 장사가 아닌가요?

롯데 10만원권 이랍니다

우린 1만원권 받았는데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조한 후 군인들의 식솔들이 산성 내에 거주했는데

그곳이 몇 해 전까지 식당촌이 있던 북한산 북한리 산성마을입니다.

북한리 산성마을은 예부터 내려온 60여 호의 마을이었습니다.

산성마을 사람들은 예부터 약초를 캐거나 산짐승을 잡으며 삶을 영위했습니다.

아직 곳곳에 사람이 거주했던 흔적이 보입니다



지금은 정비되어

있었었나 하지만

불과 10년전만해도 이곳은 장사들로 들끓었지요

사진으로 그때를 회상합니다

그때 주민들을 몰아내는것을 이주 사업이라 했네요

지금보면 참 잘한일이라 생각됩니다



옛 산성마을 위 북한산계곡 너머로 보리사란 절이 보입니다.

이곳은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의 북한산 방문에 맞춰 고양시에서 급히 지은 대통령의 휴게실로

이름은 등운각(登雲閣)이었습니다.

그 후 개인에게 팔려 지금의 보리사가 됩니다.

이제 백운동 쪽으로 향합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임금님? 부처님?

이곳도 산성마을 일부였었구요

이곳은 아마 무속인이 거주 했던곳?

모두 철거했지만 이건 그냥 남겨 놓았네요

그리 보기 싫지 않아서 인가 봅니다

이것도 역사이지요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랍니다

단풍으로 붉게 물든 길을 따라 백운동으로 들어갑니다

주변에 이쁘게 잘 갖추어진

선봉사를 지나고 있읍니다

점점 호젖한 산길로 들어섭니다

분위기는 고조되고요

중성은 노적봉과 증봉 사이의 협곡을 차단하기 위하여 쌓습니다.

지형이 평탄하여 취약한 대서문 방면이 적에게 뚫리더라도

병목과 같은 이 일대 계곡을 차단하면 행궁을 비롯한 주요 시설과 인명을 보호할 수 있기에 이중(겹성)으로 구축합니다.

숙종의 지시로 북한산성을 보완했다는 것이랍니다



.

.



 숙종은 친히 북한산성에 들려 성곽을 살폈는데,

대서문이 있는 서북 방향이 평지라서 적의 침략에 취약하니

성 안에 겹쳐 성곽을 추가로 쌓으라고 명합니다.

이름하여 중성(重城)이며, 성문을 중성문이라 짓습니다

중성문을 포함 북한산성의 문은 14개고, 지금은 수문을 뺀

13문이 남아 있습니다.

1915년 대홍수 때 중성문의 문루와 시구문, 수문 등이

유실됐으나 문루와 시구문은 다시 복원합니다



1915년 대홍수때 유실되었다가 복원된 시구문입니다

아침에 장의차만 보아도 재수가 좋다고 하지요

좋은일이 생길때까지 시구문을 들락거려봅니다

중성문 아래 '옥녀탕'이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옥녀탕을 일러 북한산계곡 중 백미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물이 말라 그런지 백미라고 하기엔 그저 그렇습니다.

대서문 옆 수문부터 중성문 인근 계곡 내 수석(水石)이

얼마나 멋졌던지 옛사람들은 이곳을 옥녀탕이라 했답니다







자 이제 중성문을 즐깁니다

문앞에서 멋짐 포즈로 산진도 찍어보고요

시구문이지요

행운을 기원하며 시구문을 들어갔다 나왔다를합니다

그리고 성벽에 올라서서

성벽의 연결부위와 그 좋았다는 옥녀탕을 찾아봅니다

그리고 사진을 부탁해보기도하지요

물론입니다

부탁까지 하셨는데요

이렇게 한장 더합니다

 


백운동문들어가기전

커다란바위입니다

중간에 글을 썼다가 지운 흔적이있네요

일제때 일본군 시설 이름이었는데 지운것이라 하네요

용학사 가는 길에 '백운동문(白雲洞門)'이라고 쓰인 해서체의

암각문이 있습니다.

'백운동문' 각자가 새겨진 바위 앞 계곡부터

증취봉 계곡(산영루 앞)까지 북한산성계곡의 백미

'백운동계곡'입니다.



중흥사 밑 산영루 위쪽 기슭에 선정비가 즐비합니다.

비석 속 각자엔 총융사 000이라고 새겨졌습니다. 영조 때 북한산성 관리를 경리청에서 총융청으로 바꾸며, 총융청 우두머리인 총융사들이 이임할 때마다 세운 선정비입니다




선정비군 사이 커다란 바위에 ‘북한승도절목(北漢僧徒節目)’이라고 새겨진 암각문이 있습니다. 철종 6년(1885년) 팔도도총섭 승대장(승군의 우두머리)의 교체과정에서 생긴 폐단을 지적하며, 산성수호에 관해 지켜야 할 엄정한 군기(軍紀)를 담은 인수인계 비문이자 일종의 대자보로, 승군들의 질서체계와 근무자세를 바위에 새겨놓은 승도절목입니다.

임금님이 행차하셨네요

이벤트인가 봅니다

임금님 하고계신 복장은 업무복이라지요


백운동 계곡으로 가는길입니다

가을의 냄새가 그윽하지요

저기 앞에서는 햋빛이 우릴 부르네요

빨리오라고요

숙종 때 팔도도총섭(전국 승대장) 성능이 쓴 '북한지(北漢誌)'엔 "북한산엔

백운동 중흥동 삼천동 청수동 등 18개 동(洞)이 있다"고 밝힙니다.

동이란 ‘아름다운 골짜기’를 일컫는 말입니다.

백운동문 글자 왼쪽에도 뭔가를 썼다가 지운흔적이있읍니다

역시 일제의 잔재입니다


대단하신 분이지요

아니 우리 남편들의 적일수도있지요

많은 사람들앞에서 사모님 자랑을 ....

10만원 내세요

아무대서나 자랑하면 안돼지요

이렇게 비석거리를 지나고요

도달한곳은 산영루입니다


산영루 앞 흰색 긴 암반 속엔 여러 개의 작은 폭포가 연이어 떨어지며 물보라를 일으킵니다. 산영루 누각은 몇 해 전에 복원이 됐는데, 예전 주춧돌만 있을 때가 더 운치가 있었습니다.


해촌 김학수옹의 산영루 그림입니다

한번 비교해 보십시요



산영루란 산세의 풍치와 물소리의 흥취에서 나온 이름으로 "산색이 맑은 물에 비친다"는 의미입니다. 산영루는 북한산에 유람온 선비들의 단골 방문처로 멋진 비경을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산영루 아래 백운동계곡엔 청담(靑潭이 있습니다. 성해응은 그의 글 속에서 "하얀 암반이 마치 흰구름과 같아 그 위를 흐르는 물줄기가 청담을 만든다"고 했다.


백운동계곡엔 산영루(山映樓)란 누각이 있습니다.  








환희령이 가장 잘 관찰되는곳이지요


환희령령을 배경으로 인증합니다

이제 북한산의 중심인 중흥사로 갑니다

중흥사는 조선시대 승대장인 팔도도총섭이 머물며 북한산성 승군과 전국의 승군을 관리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고려 초 도선국사가 길지를 선택하자, 태조 왕건이 창건하곤

고려의 중흥(重興)을 기원하면서 절이름이 중흥사가 됩니다.

고려 공민왕 때 원증국사 태고 보우(불교의 중흥조)가 중창을 하고,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성한 뒤 1711년 북한산성을 지키는 11개 사찰의

승군(僧軍)을 관장하는 승영과 8도의 승군까지 통솔하는

팔도 도총섭의 승영을 두는 수사찰(首寺刹)이 입니다

중흥사는 1915년 홍수를 당해 무너진 뒤 중건하지 못하고 주춧돌과

축대만 남았는데 당시 중흥사엔 의병을 소탕한다고

일본군 헌병대 분견소가 1907년부터 주둔하고 있었는데 홍수로 함께

떠내려 갔다 합니다.

그렇게 터만 있던 중흥사가 요즘 중건을 하면서 고요한 북한산 분지가

공사소리로 요란합니다.


산영루 맞은편 바위엔 '김성근', '안사 심상훈' 등의 각자가 어지럽게 새겨져 있습니다.

안사(按使 = 안무사 按撫使)란 조선시대 함경북도 경성 이북의 열 고을을 다스리던 외관직

또는 조선시대 변란이나 재난이 있을 때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파견했던 임시 직책이었습니다


중흥사를 본 후 청하동천으로 들어섭니다. 북한산성 내 최고의 명당지처라고 알려진 곳입니다.

청하동천으로 들어가는 초입, 커다란 바위 상단에 새겨진 암각문 '崔松雪堂(최송설당)', '大正乙卯春(대정을묘춘)'이 보입니다.

'1915년 을묘년(다이쇼 大正 4년) 봄날 최송설당'이란 의미입니다.

암각문은 아마 최송설당이 회갑을 즈음해 북한산에 유람할 적 기념으로 새긴 듯합니다.

그 내용은 문집에 한시로 남아 있습니다.

최송설당은 구한말 고종과 엄비 사이의 아들 영친왕의 보모로, 고종으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아 '송설당'이란 이름을 하사 받습니다.


 



그녀가 이곳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이유는 최송설당의 선조(先祖)

산소가 고양시 행신동에 있어 혹 이곳에 다녀가다가 북한산 내 유명한

 이곳을 구경와 새겼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암각문 왼쪽 작은 각자 '을묘 제광익(乙卯 弟廣翼)'이 보입니다.

1915년(을묘) 그녀의 동생 광익과 같이 들렸던 모양입니다.



유선대(遊仙臺)와 청하동천(靑霞洞門)은 푸른 노을이 일렁이는 동네로 들어가는 입구로,

북한산 내 신선들이 노니는 곳으로 알려집니다.

혹자는 여름날 나뭇잎으로 가려진 골에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이 바로 청하라고 했고,

조선 후기 팔도도총섭 성능이 쓴 ‘북한산지’엔 “청하동은 동문이 그윽하고 고요하여

다른 것은 모두 이와 짝하기 어렵다”며 북한산 18개 동(洞) 중 최고로 쳤습니다.

유선대가 보입니다

 숙종은 북한산성을 수비하기 위해서 산성 안에 12개의 절을 새로 지어 승군(僧軍)으로

하여금 산성을 지키게 했는데, 부왕사도 그 중 하나입니다.

창건 이후 갑오경장 이전까진 호국사찰로 명맥을 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파괴돼 폐허가 됩니다.


바로 앞에서본 유선대입니다

바위위로 커다란 벌판이 있다지요

그 유선대 바위를 돌아서면

이렇게

붉은 글씨로 청하동문이란 글씨 나타납니다

푸른 노울이 일렁이는 동네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 옆에는 또다른 글씨가 있네요

일붕 기도처 라쓰여있지요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일붕 서경보 스님입니다

가족 이름도 줄줄히....


산속에 펼쳐진 넓은 벌판

이름그대로  청하동천입니다

뭔가 기운이 펼펄 날것 같지 않나요?



그길 돌아 언덕을 오르면

옛사찰터인 부암사지입니다.

지금은 주춧돌만 횡하니 남아있네요



현재 가건물인 요사채 한 채만 있어, 오가는 이들을 벗해주고 있습니다

청하동천 경치는 끝내주지요

하늘을 쳐다보는 뷰 역시 끝내주는곳입니다



청하동은 임금님이 북한산성으로 들어오면 드실 약초들을 재배하는

곳으로 이었답니다

신선들이 먹는 약초를 임금도 드셨나봅니다

계절이 가을이라 온통 누렇게 변했는데

아직 녹색을 띠고있는

이곳은 과연 영험한 곳인가 봅니다.

부황사 근처입니다

이곳에서 생산된 약초로 임금의 약탕제를 끓일 물을 조달하는 곳입니다

특별한 물이어야지요

그래서 그곳의 이름은 어정(御井)입니다



부황사로 오르는길 왼쪽에

큰모양 바위입니다

아들 낫는 바위라지요

이제 유선대를 향합니다

왼쪽으로 올라서야합니다

그곳은 부황사지가 됩니다

그리고 넓직한 그곳에서 오늘 점심을 먹습니다

부왕사는 북한산 3대 명당처 중 하나라는 얘기도 있읍니다

부왕사는 고려 때부터 이어져 오던 절이고 이성계가 100일간 기도를 올렸던 곳이라고도 합니다.

그기운 밥과 함께 드시길 바랍니다


명산이 그렇듯이

명찰도 경치가 우선입니다

북한산 깊숙히 계곡에 숨어있는 이곳도

경치는 그만입니다

정면에 백운대 노적봉 만경대가 내삼각산이 바로 보이지요


백운대 부분을 땡겨봅니다

정상을 즐기는분이 제대로 보입니다

식사후

다시 교주님의종교활동은 계속됩니다

같은 옷을 입으신분들이지요?

장로인듯 합니다

이분은 나이 많은 대표 장로님

 그리고 이분은 홍보담당 장로이신듯합니다

그리고 다시 성지 순례가 계속됩니다

부왕사 앞엔 북한리 산성마을의 동제단(동제당)을 찾아갑니다

 

동제당으로 가는 계곡을 건너기 전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습니다.

비석엔 1965년 동제당을 수리할 때 시주한 산성마을 사람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석을 지나 계곡 위로 오르면 동제당(산신당, 북한산 굿당)이 나오는데

 마을의 무사와 안녕 그리고 풍요를 기원했던 동제당입니다



동제당 마당앞에는 돌기둥이 2개있읍니다

왼쪽은 홍씨

오른쪽은 차씨입니다

안의 그림과 연관이있나요?




아닙니다

이곳을 믿는 만신(무당)들은 박할머니당이라고 합니다.

동제당 안엔 산신님과 박씨 할머니’ 초상화가 있는데,

혹자는 박씨 할머니 그림을 인현왕후 민씨의 초상화라고도 주장합니다.

동제당 마당에 있는 신목(도당목)이 이미 죽어 고목이 됐으니 동제당의 신기(神氣)도 이미 사라져 버렸을 일입니다.

그 당목이 이제는 죽어서 베어져 버렸네요




동제당엔 지금도 몸주로 산신령을 모시는 성씨 할머니가 당집 옆방에 기거하고 있습니다

죽은 당목을 대신해서 새로운 당목으로 지정된 나무입니다

아직은 어려서 그위험이 없지만 어서어서 자라거라

자 이제 동제당을 지나지요

부왕동암문을향합니다

그길은 산길입니다

그리고 가을이구요

오늘 산행중 제대로는 처음인것 같읍니다

부암동암문과 증취봉이지요

증취봉은 삼천사 뒷산이지요


부암동 암문을 가는길에

커다란 바위를 만납니다

바위밑에는 동굴같은 공간이있읍니다

이곳은 병사들이 기거했던 내무반 같은곳이랍니다

이름하여 성랑지라합니다



부왕도암문 가는길에

복원되지않은 예전 성곽을 만납니다

상당히 초라하지요?

복원된성곽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지금보이는 이것은 총안이지요

보통 3개가 한묶음인데요

근총안과 원총안으로 구성됩니다

총안으로 구성된 담장을 여장이라 부른다지요



다 허물어져가는 성곽을 볼때

차라리 진짜 성곽이구나

이게 역사구나를 느낍니다

현대에와서 다시 복원한 성곽입니다

복원이라기보단 개축이지요

현대식으로 다시쌓은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북한산 14성문중 하나인 부암왕암문입니다

역시 북한산 18개 마을 중 하나인 부왕동에 세워져서 부왕동이구요

정식문이 아니고 물자수송이나 근무자들의 출입을 위한 문이기에

암문입니다

그 부왕동암문에대한 설명이있읍니다


부왕동암문 우측 아래 산기슭엔 부왕동암문을 수비하거나 보수를 하던 승병들이 기거했던 원각사지가 있답니다

부왕동암문은 원각사지에서 맡아 관리했기 때문에 원각문 또는 소남문(성능의 '북한지'에 기재)이라고도 했습니다.

암문은 보통 '그늘문'이라고도 부릅니다.

부왕동암문이 있는 곳을 성해응은 북한산 4대 명승지 '환희령'으로 부릅니다.

이곳에 흔적한장 남깁니다

그리고 암문을 벋어납니다

이길을 내려가면 삼천명의 승려가 있었다는 삼천사가 나옵니다

상당히 가파르지요

쉽지 않군요

우리 교주님 이럴때 신도들의 마음을 바로 알아체십니다

그래서 또 해설을 하지요

바위 신앙에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곳까지 아낙이 올라옵니다

그자체만으로도 건강해지지요

아들낮게해달라고 빈다지요

돌도 올려놓고요

조금더 왔답니다 고래바위가 나타납니다.

윗 부분만 보여서 그렇지 전체적으로 보면 딱 고래 모양의 바위입니다.

꼬리 지느러미 부분엔 감실도 있고, 머리 상단엔 파인 흔적도 있는 게 이곳을 지나던

옛 사람들은 고래바위에 소원도 빌었을 듯 합니다.

다시봅니다

고래형상이 보이나요?

고래바위를 돌아서면

넓다란 바위 가 나타납니다

잠시 쉬었다 가겠읍니다

잠시 배낭 검색좀 하겠읍니다

아래부분은 마치 치마폭을 펼쳐놓은듯이 넓다랐지요

배낭의 남은 음식도 먹고요

멀리 능선도 감상합니다

앞에 능선중

삐죽 튀어나온 바위가 보이지요

알것같읍니다

사모바위이지요

네 땡겨봅니다


사모바위입니다

그리고 오른쪽 안테나가 비봉일겁니다

그리고 더오른쪽 바위

개미들이 많이있네요

잠시 휴식을 마치고

삼천사지를 향합니다

증취봉 아래 흙 속에 파묻혀 버렸지만,

3000명의 승려가 머물렀다는 옛 영화의 삼천사지(三川寺址)를 찾아갑니다

증취봉 아래 ‘절터’라 불리는 곳에 있었던 옛 삼천사는 불교 법상종의 중심사찰로

신라 문무왕 1년(661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사찰 내엔 기록이 전혀 없다지요.


하산하는길

삼거리이지요

전혀 생각지도 않던길입니다

그냥 내려갔던길이지요

이번엔  발이 삼천사지를 향합니다

어디가 삼천사지?

평평하긴해도 절터라고 생각할수는 없네요

이런곳을 몇개 지나고

저기 축대가있는곳으로 갑니다


길인듯 아닌듯 축대가 쌓여있는곳입니다

저기가 삼천사지 일것입니다

비석이 서있던곳인듯합니다

용의 첫째아들 비히이지요?

무거운걸 지고있기를 좋아한다는

이조형물이 이곳이 삼천사지임을 알려줍니다



절이 얼마나 컷는지 알수가 없지요

3000명이 기거 했다면 엄청 큰지역을 가지고 있었겠네요

아무데나 방치했지만

곳곳이 문화재입니다




북한산은 주로 소나무로 구성되어있답니다

그런데 일부구간이 참나무로 되어있지요

아마 불이나고 소나무가 죽고 그자리에 참나무로 바뀌었나봅니다

그러니 중취봉아래 참나무 지역은 모두 삼천사부지로 생각해도 될듯합니다



지금은 없어진 대형사찰

이런 흔적으로 보여줍니다

가을을 맞이하여 더욱 쓸쓸해 보이지요

오늘 저와 처음부터 쭉~~같이하신 분니다

비히 앞에서 흔적을 남겨 드립니다

감사했읍니다

저두 한장 냄겨야지요

읍니다

처음이지요 고맙읍니다 그냥 지났쳤을것인데

알게되어 고맙읍니다

하지만 더이상의 유물은

흔적은 만날수가 없읍니다

이제 삼천사로 가야지요

삼천사지를 보고나니

오늘일정이 마무리되는듯하다

쭉 일렬로 서서 끝을향해 내려갑니다

이제는 뭐가 남았줘?

이무기 바위입니다

뱀이 1000년이 되면 이무기가 되고,

이무기가 500년이 넘어 여의주를 얻으면 용이 된다고 했습니다.

또 용이 계곡 물 속에서 나는 연습을 하다가 다쳐 날지 못하면 이무기가 된다고도 했습니다.

여의주의 확보유무와 뿔의 유무를 보고 이무기냐 용이냐를 판단합니다.

삼천사가 불이나서 용이 되어 승천하지 못하고

땅에 떨어져 바위가된 이무기 바위입니다.

이무기 바위엔 여의주도 뿔도 없었습니다.


옛 삼천사에 살던 뱀이 절과 함께 1000년을 넘기며 이무기가 됐지만,

임진왜란 때 삼천사가 소실되면서 미처 500년을 버티지 못한 이무기 역시 용이 되지 못하고 이무기로 끝을 맺은 모양입니다


옛 삼천사 터에 살았다는 이무기 바위를 본 후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선바위(부침바위, 붙임바위, 구멍바위, 남근석, 알바위 등)를 볼 수가 있습니다.


조선시대엔 돌을 세 개 던져 구멍 속으로 모두 들어가면 남아잉태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소망바위인데,

요즘은 품은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바위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나라 향풍신앙 중 바위신앙의 일종입니다.

지금 여기는 바위신항 토템이즘이 종현이즘으로 바뀌고있읍니다

광신도들 돌을 던지고있읍니다

골인이 힘들지요

그만큼 득도하기도 힘든겁니다

이제 남은건 새절 삼천사만 남았읍니다

3000여 명의 승려와 대중이 함께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던 절 삼천사

임진왜란 때는 삼천사가 한양 주변 승병들의 집결지란 소문으로 왜병의 방화로 크게 훼손됩니다

훗날 소실된 터에서 2km 아래 현재 마애불이 있던 터에 삼천사 암자를 지었읍니다

그것이 현재의 삼천사입니다


그 마애불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찰중 산신각이 제일큰 사찰이라지요

오른쪽 건물은 산신각입니다


가장 현대화된 사찰 삼천사를 마지막으로 오늘 역사문화 탐방을 마칩니다

역시 소문에 맞는 훌륭한 역사 탐방이었읍니다

여자신도들에게 잘하는것역시 변하지않았읍니다

그리고 삐질만하면 상품으로 꼬드기는것역시 수준급이지요

오늘 크게 한수 배웠읍니다

정말 집주변의 산이고

늘상다녀도 그냥 보고 지났었던 곳입니다

새롭게 느끼고 새로움을 얻었지요

또하나 그대로 우리의 삶이 100년이 지나면 또다른 역사가 되는거네요

고맙읍니다

영원하라 역사문화탐방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