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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1. 서울 북촌 탐방

종로구 재동・가회동・삼청동 등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이곳이 청계천과 종각의 북쪽에 있는 동네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예로부터 조선시대 왕족이나 고위관직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매천야록≫권1 상에 의하면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三色이 섞여서 살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북촌이 권세 있는 양반들이 주로 모여 살았던 데 비해,

남산 기슭을 중심으로 한 남촌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양반들과 하급관리・상인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후에 일제강점기에는 남촌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어,

조선인 중심의 거주지역으로서의 북촌과 일본인 중심의 거주지역으로서의 남촌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운현궁에서 시작 하였다

운현궁은 옛날 TBC방송국 운현궁 스튜디오가 있어

막연하게 알던곳이지만

실제는 고종이 살던 곳으로 임금이 되고서 궁이란 이름을 얻었다지요

운영궁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그리고 북촌을 향합니다

현대사옥 입구에서 건준터 북촌 문화센터 김성수가옥 유심당 중앙고교를 거쳐서

가회동 한옥집을 감상하고 맹사성 자택을 거쳐 장원서 정독 도서관까지

6시간 대장정을 북촌을 알기위해 투자했답니다

약속시간이 13:00 였지요

약간 늦었답니다

모이는곳 운현궁 앞 한산하지요?

탄핵여파로 현재 분위기를 보여 주는 듯

경찰이 더 많은 것 같읍니다

운현궁경내로 들어왔읍니다

좌측 휴게소 같은 곳

오늘의 주인공 전종현 세르파가 뭔가를 한참 설명중이십니다

사진 촬영 하려하니

손들어 인사하시는 분이 계시죠

저도 반갑읍니다

이제 참석자들  자기소개 시간입니다

참석때마다 하기는 하는데요

이런 야외에서는 집중이 안되지요

기념품 머프 잘 받았읍니다

오늘 도와주시는 세르파님도 참 많이 오셨네요

고맙읍니다

기념 촬영 준비중 이십니다

주최측 행사이니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행사 영원히 지속되겠지요

자 이제 시작합니다

운현궁 부터 시작합니다

운현궁은 서울 5대궁궐처럼 "궁"이란 명칭을 가진곳 입니다

원래 궁이란 명칭은 왕이나 왕실가족이 사는곳을 일컫는 말입니다

운현궁은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임금의 잠저(왕위에 오르기전에 살던집)라는 이유로 "궁"이라는 명칭을 받게 되었지요

선생님은 여러말씀을 하셨지요 서운관등등

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당시 운현궁 근처에는 운현이라는 고개가 있었다 합니다

결국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 고갯길에 살았던

흥선 대원군의 개인집이 "운영궁이란 명칭을 부여 받게 되었답니다

이와 비슷한 곳이 강화도 철종이 살던 곳 " 용흥궁"이있지요

현재 운현궁은

아래 안내도와 같이

수직사,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등만 남아 있읍니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아래 지도의 노란색부분이 운현궁의 원래 면적이었고

빨간색부분이 현재의 면적이었다

구글 지도로 계측해보니 원래 면적은 약 2만평에 달하였으며

과연 궁이라 불릴만큼 큰 건물 이었구나 생각해봅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1/4로 축소되었지요


이 담장은 운현궁 중에서도

안과 밖을 구분하는 담장입니다

일종에 앞마당과 내부를 구분한다고 봅니다

자 이제 역사 해설이 시작 되었지요

여자만 좋아하시는 선생님 이십니다

오늘 따라 오늘 주제에 어울리게

한복을 곱게입고 오신 3모녀가 계십니다

여자만 좋아하시는 선생님

당연히 그곳에 집중하십니다

물론 상품권도 집중 됩니다

금액 확인하시고 계시죠?

하지만 본연의 임무는 절대 소홀하지 않읍니다

내 생각엔 저런 열정적인 모습은

무슨 일을 하셔도 충분히 성공 가능하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정령은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발휘 하고 계신다고 확신합니다

그 다른 곳이요?

여자입니다

여자 앞에서는 사족을 못쓰시거든요

반대로 남자들 한테는 냉정하십니다

제일 먼저 설명은 수직사입니다

운현궁 정문 오른쪽에 있는 행각으로,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 업무를 맡은 이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부터 흥선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고,

흥선대원군의 권력이 막강해지면서

경호가 필요해지자 궁에서 경비병이 파견되고, 관리인들이 많아졌다고 한답니다.

그 수직사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운현궁에 대한 설명이 시작됩니다

먼저 솟을대문이지요

 입구에 높이 솟아 있는 솟을대문은 양반집의 상징이에요.

행랑채보다 기둥을 높게 세워 솟을대문이라고 하지요.

문은 원래 담장 높이라야 했다지요

한대 지위가 높아져서 가마나 말을 타게되니

일반문으로는 출입이 불가능해졌다지요

그래서 문이 자연스럽게 올라갔답니다

종2품이상이 되어야 이런 문을 가질수 있답니다

대문앞 이돌의 용도는?

가이드가 설명하기위해서?

아니지요

말이나 가마 또는 인력거를 타고오면 높잔아요

이 돌을 밟고 내린답니다

이해가 되네요

그 이름은 노두돌이라 한다지요

대문안릉 들어섭니다

노안당입니다

건물 용도는 사랑체인대요

실제는 대원군이 업무를 보던 곳이랍니다

이분 지금 정열적인 모습으로 설명하는 내용은

"금위대장 나가시니 앞을 물리고, 중문으로 모시도록 하여라."


그런 대원군이 젊었던 시절 이야기부터입니다.
몰락한 왕족으로 기생집을 드나들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술집에서 추태를 부리다 금군 별장(종2품 무관) 이장렴이 말렸습니다.

화가 난 대원군 이하응이 소리쳤습니다.
"그래도 내가 왕족이거늘...일개 군관이 무례하구나!"

그러자 이장렴은 이하응의 뺨을 후려치면서 호통을 쳤습니다.
"한 나라의 종친이면 체통을 지켜야지.
이렇게 추태를 부리고 외상술이나 마시며 왕실을 더럽혀서야 되겠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뺨을 때린 것이니 그리 아시오."

세월이 흘러 이하응이 흥선대원군이 되어 이장렴을 운현궁으로 불렀습니다.
이장렴은 부름을 받자 죽음을 각오하고 가족에게 유언까지 했습니다.

이장렴이 방에 들어서자 흥선대원군은 눈을 부릅뜨면서 물었습니다.
"자네는 이 자리에서도 내 뺨을 때릴 수 있겠는가?"

이에 이장렴은 거침없이 대답했습니다.
"대감께서 지금도 그때와 같은 못된 술버릇을 갖고 있다면
이 손을 억제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장렴의 말에 흥선대원군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조만간 그 술집에 다시 가려고 했는데 자네 때문에 안 되겠군."
그리고 자기 오른손으로 자기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오늘 좋은 인재를 하나 얻었다."

흥선대원군은 이장렴을 극진히 대접하고
그가 돌아갈 때는 친히 문밖까지 나와 배웅했습니다.
그리고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금위대장 나가시니 앞을 물리고, 중문으로 모시도록 하여라."

노안당이지요

추사 김정희글씨인가?

노안당 현판 왼쪽 끝부문에 서위(書爲) 석파선생(石坡先生) 노완(老阮)이라고 쓰고

김정희(金正喜) 인(印)이라는 낙관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서위 석파선생'이란 흥선대원군의 호가 석파로

흥선대원군을 위하여 이 현판을 섰다는 해석을 가능케하고 있다.

노완은 추사 완당 승연 예당 시암 등 30여개의 호 가운데 하나다.

한마디로 노안당의 현판을 흥선대원군을 위해 추사 김정희가 썼다는 뜻이다.

현재 노안당에 게시된 편액은 2006년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오옥진 각자장에 의해 모각되어 게시된 편액이며, 
원 편액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제 노안당을 둘러봅니다

그러고 아까 그 중문으로 향합니다

여기가 그 중문입니다

당시 세도가인 대원군을 만나러 숫한 사람들이 왔었답니다

여기를 나가면 출세가 보장되었다지요

그런데 들어온문으로 나가면 낙방이랍니다

다음은 노락당입니다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1864년(고종 1)에 건립되었다.

고종이 대제학 김병학()에게 짓게 한 노락당기()에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한 자 다섯 치 밖에 안 된다’라는 내용이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몸채는 정면 10칸·측면 3칸이고 건물 왼쪽으로 1칸,

오른쪽으로 2칸이 더 있으며 남쪽의 행각과도 연결된다.

운현궁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치러졌을 때 가례 준비 일체를 노락당에서 했다고 하며,

잔치 등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삼간택 후 왕비수업을 받은 곳으로 전해진다

석가래를 본다

둥근 석가래부부만 있다면?

홋석가래이다

네모난 석가래까지 있다면 ?

겹석가래이다

이곳은 겹 석가래이다

석가래 앞에 넓은 판이 언져져있다

이것은 부연이라 한단다

우리가 말을 하다가 부족하면 부연 설명을 한다고 하는 그뜻?

부연은 조정이 된단다

해가 높은 여름에는 햇빛이 퇸마루까지 가도록

해가 낮은 겨울에는 햋빛이 마루 안쪽까지오도록 조정이 가능하게 지었단다

한옥의 비밀이란다

노안당을 구경하고 나가는데

한복을 입은 노부부이다

사진사가 연출을 한다

이렇게

중국인? 그런가보다

그냥 그렇다

한복이 잘 어울리지는 않는 다는 생각이다

마지막 건물 이노당이다

이로당은 노락당과 마찬가지로 안채 역활을 하는 곳입니다

남자는 출입할수없고 여자들만 출입할수있는 공간입니다

이로당의 주인은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이다

대원군이 외부 일을 했다면

여기서 부녀자로서 내조할수있는 모든걸 했을것이다

그런대 현판글씨중 "이"자가 좀 특이하지요?

이노는 두 노인으로서

흥선대원군과 그부인 민씨를 칭한다하지요

이자를 위로 올링것은 두분을 공경한다는 뜻이랍니다

이로당에서 동쪽 옆마당으로 나가는 문입니다

여지만 다니는문이지요

그당시 여성평균키가 145m 정도?

옆마당은 살림공간인듯하네요

우물이있구요

석빙고 입니다

안채에서 설명듯는 모습은 더욱 어울리지요?

딸들은 설명은 관심이 없는듯

스마트폰만 가지고 놀고있지요

다시 경청 모드로

이분들도

딴곳에서는 주목 받는 분들인데

오늘은 한복에 밀렸읍니다

찬밥

자 이제 운현궁이 마무리 되어갑니다

마지막을 열심히 설명중이시고요

경청하시는 분들입니다






호도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끝이었던것으로 기억합니다

각자 유물 전시관을 돌고 운현궁 탐방은 끝이 았지요

자! 이제 본격적으로

북촌을 향합니다

오늘 우리나라도 역사적인 날이지요

대규모 시위?

몇십년후 또다른 역사 탐방에서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는 탐방이 있을수 있겠지요

시위는 시위이고

역사 탐방은 계속됩니다

북촌으로 들어서서 제일 처음 만나는 곳은 북촌리 식당이다

지금이야 그냥 대중 음식점이지만

이곳은 현재 더불어 민주당의 원 뿌리인 한민당이 창당한 곳이다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에 참가한 정치세력으로는

1945년 8월 18일 원세훈이 발기한 고려민주당,

8월 28일 김병로·백관수 등이 발기한 조선민족당,

9월 4일 백남훈·윤보선 등이 발기한 한국국민당,

9월 7일 김성수·송진우·서상일 등 동아일보사 계열의 인사들이 발기한 국민대회준비회,

9월 7일 이인·조병옥 등이 결성한 '충칭[重慶]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 등이었다.

이곳은

현재는 현대사옥

그전은 휘문고교 자리

더 옛날은 재동궁

그리고 조선 최초 서민 의료기관인 제생원터입니다

경찰 차량이 점령을 했읍니다

그래도 가는사람은 전혀 지장이 없지요

이제 북촌에 들어선겁니다

건준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일본이 패망하고 미군정이 들어오기전에

혼란기였지요

모두들 해방의 기쁨

아니면 정권잡을 야욕에만 집중할 무렵

일본으로부터 정부를 인수하고 체계적으로 건국을 하는 조직이 생겨났읍니다

바로 이자리에서지요

그 맨앞에 선 사람이 여운영이었구요

결국 좌익으로 몰렸고

살해당했지요

지금 그자리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는데

보현 빌딩이네요

북촌 문화센터입니다

북촌 계동 현대사옥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민재무관댁이다.

이 집은 구한말 탁지부의 재무관을 지낸 민형기의 집으로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을 본떠 대궐목수를 지낸사람이 지었다.

 며느리였던 이규숙 씨가 양반가 음식에 대해 구술한 책으로 인해 계동마님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저택은 외형은 한옥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만,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은 아니고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다.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가 붙어 있는 ‘ㄷ’자형 건물과 뒷편에 별당, 또 다른 ‘ㄱ’자형 안채 건물이 있다.  

지금은 서울시에서 매입하여 재단장하여 북촌 관람의 출발점 역할을 하는 북촌문화센터로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또 이야기가 만발하십니다

모두들 툇마루에 앉아 경청중이십니다

내용에는 웃음이있지요

아마 아들 5섯을 낳았다지요

그래서 이집을 샀더니 딸만 쭉~~~

이런 이야기였을겁니다

앞에서는 진지하지만

뒤에 한복은 배고픔을 해소중임니다

이렇게 잠시 북촌문화센터를 마칩니다

이곳은 김성수 고택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북촌은 조선시대 권문세가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이다.

조선시대 한양에 살았던 양반들 중에서도 왕족이나 고위관직을 지냈던 사람들이 많아 거주했던 곳이다.


북촌은 조선시대부터 세도가들이 살던 정치 1번지였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사회, 경제상의 이유로 대규모의 토지가 소규모의 택지로 분할되었으며,

지금 볼 수 있는 어깨를 맞댄 한옥은 1920년대를 전후하여 개량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서

“일제의 식민지배가 시작된 1910년경 북촌은, 과거의 핵심 엘리트와 명문가가 모여 있던 공간에서

민족운동과 관련된 공간으로 재편된다

그러한 변화의 상징적 인물이 인촌 김성수이다.

김성수가 북촌으로 오면서 중앙고등학교를 인수했다.

원래 김성수와 송진우, 둘 다 전라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다.

김성수의 할아버지는 지방관이었는데,

김성수가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서 부모의 재산을 기반으로 새로운 판을 벌이게 된다.

 중요한 것이 근대적인 공장, 즉 경성방직을 세운 것이다.
이는 아주 신기한 일이다. 그 시기에 지주들의 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잘 전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성수는 신흥자본가이자 온건한 민족운동가로서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했다고 볼 수 있다.

김성수가 있었다면 또다른 이가 한용운이다

불교계

이곳에 불교 잡지 유심 이란 출판사가 있던 곳이라지요

지금은 게스트 하우스로 운영된답니다

특히 이곳은

한용운이 주도하여 불교계 3.1운동을 주도하였답니다

여기는 석정 보름우물이다

이름의 연유는 물이 보름은 맑고 보름은 탁해서 보름우물이란 이름을 얻었단다


중앙고등학교입니다

김성수가 설립했다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명문학교이지요

오늘 한복에 밀린 모델들입니다

원래는 프로 모델들이었는데

오늘은 이렇게 숨어서 포즈를

골목길 포즈입니다

수줍어서

한복보단 아니지만

비교적 잘 어울리지요?

모델이 비뀌었답니다

애써 웃지만

어딘지 패배자의 모습이 숨어있는듯하지요

역시 A급 모젤인데

오늘은 ?

같은 여자라도 선생님 눈 밖에 난 듯 합니다

무섭지요?

북촌은 외국인들도 참 많이 오지요

우리나라를 잘 볼수있는곳이기때문일겁니다

회화나무

주택과 전선줄사이로 불쑥 솓은 회화나무입니다

예전에  장원급제를 하면 임금님이 하사했다는 회화나무입니다

이나무는 궁궐,사찰, 그리고 사대부집외에는 심을수가 없다지요

북촌의 상징적인 한옥 골목으로 가는 중입니다

너무 이뻐서

망서리다 망서리다 한장 부탁을 했읍니다

그렇지요?

난 너무 착각속에 살았네요

그래도 난 옆에서면 어울리줄 알았거든요

정말 안어울리네요

마안합니다 그림 망쳐 놓아서

난 아직도 28청춘인줄 알았다니깐요

차라리 이렇게 그림자로 가려 놓으니 좀 나으네요

북촌 한옥의 메인이지요

이 언덕이요

참 사람도 많네요

한옥엔 역시 한복이 어울립니다

제집을 찾은 듯합니다

한층 돗보이지요

이렇게 단체로 보아도 좋구요

이렇게 홀로 찍어도 참 잘 어울리지요

저도 북촌 한옥집 골목에서 인증 합니다

담에 올때는 화려한 색 옷 입고 와야할듯합니다

자꾸초라한 생각이 듭니다

여자만 좋아하시는 세르파님

집에 사모님한테 이를까봅니다

아니 경사 났네요

집에 사모님한테 이를까봅니다

시키는대로 하시는 이 분들도 끼는 있는겁니다

싫지는 않은가 보지요?

이분들은 동남아에서 오신분들입니다

단체사진 제대로 인증하고 계시지요

서양 꼬마들도

우리 일행과 섞이면서 즐거움이 배가 되고있지요

그들 부모입니다

프랑스에서 왔다지요

아마 우리 문화에대한 진지한 토론일겁니다

한복입은 외국인도 보이지요

모두들 우리 문화를 몸으로 느끼고 있읍니다

언덕위로 올라와서

한블럭 오른쪽입니다

취운정이란 현판이있지요

역사적인 건물?

사실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려고 선거전 이집을 구매했답니다

약 3개월 이집에서 선거운동하고 이집에서 대통령 당선이 되었지요

그만큼 행운이 있는 집이란 말입니다

저 많은 사람들이

문고리잡고 소원을 빌려고 대기중입니다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해보는겁니다

아수라 장입니다

그리고 북촌 최고의 전망대입니다

제일 높은 곳이기도하지요

세조때 좌의정을 지낸 청백리의 상징

맹사성 집터입니다

맹사성은

조선 초기의 문신 맹사성은 황희와 함께 조선 최고의 재상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후세인들은 맹고불이라 하면 검은 소 등에 앉아 피리를 불고 있는 노인을 연상할 정도로 친근한 존재였다

맹사성은 최영장군하고도  관계가 있지요

같은 마을에 살던 최영이 낮잠을 자다가 짙은 안개 속에서 용 한 마리가 배나무에서 승천하는 꿈을 꾸었답니다.

깜짝 놀라 깨어 밖으로 나가보니 어린 맹사성이 배나무에 올라가 배를 따고 있었다지요.

최영은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고 맹사성 아버지 맹유에게 찾아가 자신의 손녀딸과 혼약을 맺었답니다.

그리하여 맹사성은 고려 말의 명장이자 충신 최영을 처조부로 모시게 되었다지요

그리고 조선개국

최영은 역적이 되었지요

그상황에서도 좌의정까지 갔으니 맹사성의 총기는 대단 했다는 거지요

그자리는 동양문화 박물관이고요

또 더높은곳은 카페로 운영되고있읍니다

커피를 먹어야 전망이 가능하답니다

다음으로 가지요

이곳은 북촌에서 청화대 쪽을 바라보는 곳입니다

시국이

청와대 앞은 경찰 버스로 꽉차있읍니다

명재상 맹사성이라도 나와야 하겠네요

다시 이곳에서 서울을 그려봅니다

서쪽의 인왕산입니다

북쪽의 북악산이구요

동쪽입니다

이집들을 뚫고 나가면 낙산입니다

그리고 이쪽의 저넘어에는 남산이있읍니다

인왕산 북악산,낙산 그리고 남산을 연결한 것이 서울성입니다

조선을 창건하면서 여러곳을 수도로 거론하였지만

이곳 4개산을 연결하는 한양이 풍수지리적으로 우수하였답니다

언덕아래 삼청동길입니다

차량은 없구요

시위대 깃발만 요란합니다

오랫동안 북촌과 함께한 목련 나무입니다

시국이야 어째든

자기 역활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지요

봄에 맞추어 하얀 꽃을 피우기 위한 주비가 한창이네요

그길 따라 쭉~~ 내려가는중

장원서 터를 지납니다

장서원은 원래 상림원이라 했으나세조때 장원서로 바꾸ㅏ었답니다

장원서는 각종 과목과 화초 재배를 관장하던 과원색(果園色),

배·밤·은행·석류·유자 등 생과일을 관장하는 생과색(生果色),

곶감·잣·호도·대추 등의 건과에 관한 일을 하던 건과색(乾果色),

공납된 미곡의 사용을 담당하던 작미색(作米色) 등으로 나누어 업무를 관장했다.

당연히 과목과 화초 재배를 관장하니

꽃이 많았겠지요

그래서 이동네 이름은 화동이었답니다

그이름이 지금은 화개동으로 바뀌었지요

그래서 이동네는 집집마다 이렇게 꽃을 걸어논 집들이 많답니다

축대에 김구선생님이 싼타 복장을 하고 계십니다

그앞에 한복입은 남녀가 사진을 찍고있지요

멋찐 한쌍입니다

그런데 한국분이 아니라지요

우리일행중

한복 입으신분이요

이 젊은 남자분이 멋져보인다나요

사진 한장 부탁했구요

제가 아까 이쁜아가씨와 사진 찍고싶은것과 같은건가요?

제가 아까 이쁜아가씨와 사진 찍고싶은것과 같은건가요?

남자 색씨가 보고있는 상황에서 ....


조금더 진행했답니다

정독도서관이지요

이곳이요?

우리 어렸을적 선망의 대상이었던 곳이지요

지금은 이사 갔지만

그 유명한 경기 고등학교 자리입니다

그런데요

이곳은 역사적으로도 여러가지 역활을 했던곳이네요

화기도감터

무기를 만들던 곳이라지요

그리고 더 이전에

집현전 학자이고

사육신중 한명인 성삼문 선생이 살던 곳이랍니다

그리고 최근까지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자리랍니다

이제 마무리입니다

예정에의하면 윤보선대통령 사저

그리고 양반교회로 유명한 안동 교회를 가야하지만

시국이 그거리를 갈수 없게 하지요

여자만 좋아 하시는 셀르파님이신데요

여자들도 세르파님만 좋아하시나 봅니다

인기 만땅입니다

마무리 이야기로 성삼문 이름에 관한 이야기하십니다

외할아버지가 성삼문 출산할때 좋은 시를 잡으려 시간을 지체 시켰다지요

그래서 3번을 물었답니다

그래서 3번 물었다해서 삼문이가 되었다지요

할아버지 덕분에 3번 묻고 나와서 37세까지 좋은일 많이하고 살았다네요

할아버지가 원하는 시간까지 지체했다면

성삼문이는 60넘게 살았을꺼라네요


문밖에서 할아버지가 묻지요 

아기야! 나왔냐?

저기 썬그라쓰 쓰신분

아니요~~~ 아직입니다~~~

연기 좋다고

마지막 상품권 나갑니다

역시 여자만 좋아하시는 세르파 님이십니다


이렇게 북촌 역사문화 탐방을 마칩니다

북촌 2번째인데요

코스가 좀 바뀌었지요?

역사문화 탐방이 워낙 인기가 있어서

정원 30명으로 운영해야 하는데 70명이 왔다네요

그래서 운현궁을 많이 활해하였고

아무래도 사람이 많으니 산만해졌지요?

지난번과 같은 내용도 있구요

새로운것도 많이 배웠답니다

여자만 좋아하는 역사문화 탐방이지만

 여장이라도 하고서

쭉~~이어 참석하고 싶읍니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