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24-30)2024.08.03. 소백산

    소백산 비로봉, 小白山'''밝음' '東明'을 숭상하던 예맥족이 신령스런 산에 '' 자를 붙여 천신(태양신)께 제를 올리는 곳을 알린 표시고, '비로'는 원래 '부루'로 산 중 최고봉에 붙였던 산악신을 숭배하던 이름 흔적이다. 옛날 선조들은 하늘과 가까운 높은 봉우리에 올라 하늘과 소통하고자 했다. 하늘과 소통했던 신령한 산 이름에 ''이나 '' 또는 '', '' 자를 붙였고, 산중에 있는 신령을 '부루'라 했다고 하니 ''은 하늘과 소통하는 곳이요, 부루는 산을 다스리는 신령이다. 풀이하는 학자마다 각자 다르니 가장 그럴 듯한 걸 택할 수 밖에...

   훗날 불교가 들어오면서 향풍(鄕風)과 불풍(佛風)이 섞여 사방을 환하게 비추는 광명의 부처님인 화엄계열의 '대일여래(大日如來)'라 번역되는 '비로자나불''비로'를 따와 소백산은 물론 금강산, 묘향산, 팔공산 등의 상봉에 '부루'라는 명칭 대신 갖다 붙인다 향풍은 외풍에 왜 항상 밀리는지... 하긴 그게 문명이나 문화의 방향성이다. 고급문명이나 문화가 들어오면 저급하거나 약한 세력의 문명이나 문화는 퇴조하고, 강하거나 새롭고 자극적인 문화 문명이 자릴 잡는 것, 그것이 역사이자 현실인것이다

track_20240803_080550.trk
0.25MB

 

오늘은 번개가 소백으로 쳤다.

그래서 차량 2대로 8명이 어의곡 탐방센터에 모였다. 그리고 비로봉으로 다시 국망봉으로 그리고 늦은맥이재를 거쳐서 원점인 어의곡으로 오는 산행이었답니다

이더운날 잠시 다녀오는줄 알았는데

이렇게 힘들줄이야 거진 녹초가 되었는데 내려와서 거리를 보니 17KM나되네요

1400미터가 넘는 높은산인데 힘들었겠네요 거의 쉼도 없었는데 7시간 소요했답니다

어의곡 주차가 심각하다는 1호차 연락에 무조건 도착했어요

그리고 틈새에 꾸겨서 주차하고  1호차분들과 반갑게 인사합니다

할머니 korea에 나갈만한 미모이시지요

직녀할머니 오늘 많이 이뻐요

헤어도 변했네요

잠시 ㅇ니사후 출발합니다

그리더운줄은 모르겠지요

그런데 습도가 높아요

 

비로봉 방향으로 나아가자 동남편으로 금계호를 품고 있는 풍기읍 순흥면 금계리가 보인다. 비로봉과 연화봉 그리고 도솔봉 세 봉우리 사이 산기슭에 '닭을 닮은 금빛 바위, 금계암(金鷄巖)'이 있는데 그 닭바위가 새벽 여명 시엔 금닭으로 변한다고 했다. 금계바위 아래 금계마을은 '정감록'에 그곳을 일러 어떤 천재지변도 비켜 갈 '십승지지'라 했으니 변방에 난리가 터졌다는 소문만 돌면 남녀노소가 남부여대해 이곳으로 몰렸다는 얘기가 떠돈다.

 

 

 

'순흥'하면 단종복위운동과 관련된 충효의 고을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 6남 금성대군이 떠오른다. 태조 이성계가 세자로 책봉한 방석이 1차 왕자의 난에 패해 유배를 가던 중 이방원의 휘하에게 참살되고 광주 땅 남한산성 동편 애기능선에 묻힌다. 방석은 어린 나이에 죽었기에 후사가 없어 제를 올리지 못하자 세종대왕은 아들 금성대군을 의안대군 이방석의 양자로 입적시켜 봉제사를 받들게 한다. 금성대군은 큰형 문종이 죽고 둘째형 수양대군이 단종을 겁박하자 수양대군을 날카롭게 비판하기 시작한다. 수양은 세종의 후궁이자 단종을 키워준 혜빈 양씨와 단종의 친위그룹을 역모의 혐의를 씌어 귀양보내면서 금성대군도 이에 끼워 넣고는 그날로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양위받는다. 그후 사육신의 단종복위사건을 마무리지며 세조는 금성대군을 삭녕에서 순흥으로 이배를 시키고 상왕이 된 단종을 노산군으로 감봉하여 영월로 유폐

영월과 순흥은 산 하나만 넘으면 서로 맞닿는 곳으로 이렇게 둘(단종과 금성대군)을 가까운 곳에 안치해 놓은 이유는 아마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세조의 음모가 도사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영월에 있는 노산군을 다시 왕좌에 복위시키고자 금성대군은 순흥도호부 부사 이보흠을 부추기고 그 역모가 세조 일파에게 고변되어 금성대군은 사사되고 이보흠은 유배 후 교살되며, 순흥의 선비들과 관련 부민들이 모두 참살되는 비극을 겪는다. 그후 순흥도호부도 폐부되면서 노산군 역시 사사되는 비극적인 단종애사가 끝을 맺는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순흥은 다시 위치가 복귀되고 영월과 순흥 고을 사람들에 의해 태백산 산신으론 단종임금이 모셔지고, 소백산 산신으로 금성대군이 모셔진다. 죽어서도 도시나 마을로 내려오지 말고 산에서나 살라는 얘긴가 보다.

능선에 올라서자 비로봉 반대방향으로 국망봉이 보인다. 국망봉(國望峰)의 이름유래론, 경순왕 김부가 신라를 고려 왕건에게 바치자 아버지를 원망한 마의태자가 경주를 떠나 금강산으로 가던 중 이곳에 올라 월성 땅을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는 설과 조선시대 대장쟁이 백순이가 선조임금이 붕어하자 매일 산봉우리에 올라와 한양 땅을 바라보며 3년 동안이나 눈물을 지었고 이어 퇴계 이황이 죽자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곳이었다는 얘기, 풍기 땅 선비들이 봉우리에 올라 국태민안을 위해 제를 올리던 곳이라는 등, 여러 설화로 국망봉이라 불렸다는 설얘기가 전해진다. 대개 국() 자가 들어간 국사봉, 국망봉 등의 봉우리들은 王師國師 혹은 遺臣이나 儒臣들이 나랄 생각하며 제를 올리던 봉우리거나 탄식을 했던 곳으로 보면 타당하다.

마의태자가 서라벌을 떠나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덕주공주와의 얘깃거릴 만든 월악산 아래 하늘재 넘어 미륵사 석굴과 불상도 있는 걸 보니 소백산 국망봉 인근 단양이나 충주에서 오랜 세월을 머물렀던 듯하다. 그 후 마의태자는 이곳을 떠나 양평 용문사에 들려 나무지팡이로 용문사 은행나무 전설을 만드는데 아직도 전설의 주인공을 놓고 의상 그리고 원효와 힘 겨루기를 한다. 명성산에 들어서는 엄청 눈물 지었고, 설악산에선 고려군과 항거한 흔적도 나타나니 그의 금강산행이 무척이나 고행길이였겠다는 생각도 든다. 또 대장쟁이 백순은 나막신을 신고 3년간이나 소백산을 오르내렸다고 하던데 3년간 이곳은 비만 내렸는지 이해가 잘 안되는 대목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56대 경순왕은 나라를 고려 왕건 태조에게 물려주고 천년의 사직과 백성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비우고 명산 대찰을 찾아 헤매다 제천군 백운면 방학리 궁뜰에 동경저라는 이상한 집을 짓고 머물러 있었고, 덕주공주는 중원군 상모면 덕주사에 의탁하여 부왕을 그리며 한 많은 세상을 눈물로 보내다 가련한 모습을 암벽에 아로새기기도 하였으나 산 목숨은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왕자인 마의 태자는 신라를 왕태조로부터 회복하려다 실패하자 엄동설한에 베옷 한벌만 걸치고 망국의 한을 달래며 개골산으로 들어 갔다고도 한다.

그후 마의태자는 충청도와 경상도를 경계한 국망봉에 올라서 멀리 옛 신라의 도읍 경주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하여 국망봉이라 하며 마의태자가 너무나도 슬피울어 뜨거운 눈물에 나무가 다 말라 죽어서 국망봉에는 나무가 나지 아니하고 억새와 에델바이스등 목초만이 무성할 뿐이라고 옛부터 전해오고 있다.

현재도 국망봉엘 가면 큰 나무는 없고 풀만이 무성할 뿐이며 소백산 철쭉제 때 많은 등산객 이 국망봉을 지나가며 마의태자 흉내를 내면서 야영하는 등산객이 많이 있다.

삼국의 영토분쟁시 소백산 성상 능선이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싸움터였다. 소백산맥 정상에 소백산성, 죽령산성, 남천성골산성, 온달산성과 국망봉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으며 직선 거리의 산이다.

이곳이 영토분쟁의 기마전 터였다고 한다.

 

영춘면 남천리와 백자리 사이에서 시작하는 구봉팔문은 2개면 5개리에 걸쳐있는 자연의 신비함과 불교의 법문과 일치하는 기이한 자연형상으로 9개 봉오리에 8개 골짜기를 문에 비유하여 문마다 이름을 붙였는데 매우 기이하고 인생을 살아 가는데 많은 교훈을 주는 자연형상으로 첫째 봉오리를 아곡문봉(我谷門峰), 둘째 봉오리를 밤실문봉, 셋째 봉오리를 여의생(如 意生)문봉, 넷째 봉오리를 뒤시랭이 문봉, 다섯째 봉오리를 덕가락(德辛)문봉, 여섯째 봉오리를 곰절(能寺)문봉, 일곱째 봉오리를 배골문봉, 여덟째 봉오리를 귀기문봉, `````아홉째 봉오리를 새밭 (乙田)문봉이 국망봉 계곡에서 끝이난다. 여덟문은 1문안골을 아골문안, 2문안을 밤실문안골, 3문안을 여의생문안골, 4문안은 덕가락 문안골, 5문안을 곰절문안골 6문안을 배골문안골, 7문안을 귀기 문안골, 8문안을 새밭문안골 이라 한다. 9봉과 8문이 모여서 이루어진 거대한 자연의 형상을 9봉8문이라한다. 9봉8문이 합하여 표대봉(1066m)에 끝이 모여 저 신선봉으로 올라가 마치 접는 부채꼴 모양을 이룬다.

9봉중 곰절문봉을 중심으로 정확하게 한자의 팔자 모형을 이루고 있다. 자연의 오묘함과 기이함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옛부터 이곳에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불교에 입문하여 득도를 목표로 하여 법문을 오르려고 무수한 세월을 흘러 보내고 결국 법문에 오르지 못했다하여 그 힘과 정열을 쏟은 곳이라 하여 법월팔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구인사의 중창조사인 상월원각 대조사이신 박상월스님은 9봉8문과 법월 팔문을 올라 국망봉과 신선봉 사이에 상월이라고 새겨 놓아서 상월봉이라고 부르고 있다. 옛날 불제자가 오르지 못한 법문을 상월스님이 넘었으며 구인사 중창조사이신 상월조사스님은 생전에 9봉8문 과 법월팔문을 이렇게 풀이 했다고 2대 종정 스님이셨던 남대충 대종사님이 후세인에게 전했다. .

법문은 8문에서 시작한다. 법문에 입도 하려면 새밭에서 마음을 바르게 정하고 농부의 마음(農心)으로 돌아가 자연과 벗을 삼고 밭을 일구고 열심히 곡식을 가꾸다보면 자연생리와 우주의 변화법칙을 자연 알게되어 7문인 귀기의 경지에 다다르면 모든 세상물정과 자기 수련에 관한 귀가 열려 나쁜소리나 법도에 어긋나는 소리 남을 해하는 소리는 듣는 즉시 잃어버리고 오직 바른소리 만을 들을 수 있고 판단하는 능력이 배양되어 바른소리만을 잘 듣게 된다.

그러면 다음순서인 6문인 배골로 와서 열심히 배우게되고 자기 심신을 수련하고 익히게되며 악함을 멀리하고 선함과 진리를 몸소 실천해야 한다. 6문의 경지를 지나면 수도자의 자세가 어느정도 정립된다. 5문인 곰절에 와서는 열심히 곰같이 일을 하며 더욱 불도에 정진하고 타인의 일을 간섭하지 아니하고 말을 삼가 남을 절대로 험담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각에만 정렬을 쏟아야 하고 물욕을 완전히 버려야만 5문을 통과 할 수 있다.

그 다음은 4문인 덕가락에 와서 자기의 덕의 척도를 시험하는 덕을 펴서 가까운 이웃친지 모든 자연인에게 베풀어야 한다. 이때에 자기가 닦고 얻은 만큼 또는 공덕을 쌓은만큼 결과를 처음으로 자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3문인 여의생에 오면 여태까지 닦고 쌓은덕이 자기의 뜻과 생각대로 이루어지고 자기가 수행하고 고행한 만큼 나 자신에게도 덕이 돌아오게 되고 덕이 펴진다. 그 문이 밤실에 와서는 밤꽃이 뭉실뭉실 피어나는 연꽃처럼 열매를 맺는 결실의 문턱에 다다른다.

이때 자기가 적게 닦고 크게 얻으려는 허망, 적게 뿌리고 많이 거두려는 허욕, 열심히 일하지 않고 또 고행하지 않고 이루려는 허황된 꿈이 득도와 타락의 윤곽이 드러난다. 이곳에서 득도문에 자신이 있는 사람, 즉 밤꽃 같이 알찬 열매가 맺어질 사람만이 득도의 문인 1문인 得道의 문 我尊(天上天下 有我獨尊)을 이루어 신선봉에 올라 하늘로 영혼이 승천할 수 있다는 인간의 수행방법을 산의 형상이 말해주고 있고 선천8괴(8문) 후천9궁(9봉)을 이곳 소백산 구인사가 있는 곳에 심어 놓은 것이라 했다는 이야기를 백자리 김완우씨가 상월 원각대조사님이 남대충 대선사에게 들려준 것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