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26대 임금 고종은 참 어렵게 왕이 되었지요
25대왕 철종이 후사 없이 죽게되자
다음 왕을 선정하는데 많은 곤란이있었지요
영조가 죽고 사도세자에게는 아들 중 정조가 뒤이어 왕이 되는데
순조, 헌종으로 이어지고 후사가 없자
정조의 동생 은연군의 손자 철종이 즉위합니다
철종 또한 후사가 없었지요 막막해졌는데
막 족보를 뒤졋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다시 정조의 동생인 은선군으로 갑니다
은선군은 아들이 없어 인조의 3째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을 양자로입양합니다
그 남연군의 아들이 흥선대원군이고 그아들이 고종 임금입니다
그 남연군 묘지가 있어 유명해진 가야산입니다
도립공원 관리사무소 앞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가야산 석문봉 옥양봉을 거쳐서
원점으로 하산하는 일정이지요
평범하지요 10Km가 조금안되는 거리입니다
4시간 30분 소요했네요
평범한 코스에 적당한시간 소요했지요
덕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 주차장내의 조형물입니다
소원을 말해봐~~~
솟대로 구성된 조형물사이로 남연군묘의 주산인 석문봉이 보입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에 지시에 의하여 전국을 돌고있는
댕대 최고의 풍수쟁이입니다
드디어 이곳에서 그명당자리를 찾았다네요
마을 입구에있는 남연군 묘비입니다
비는 높직한 사각받침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비 앞면에는 ‘남연군충정’이라는 비의 명칭을 가로로 새겨 놓았다.
흥선대원군의 아들이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된 후 이 비를 세워 두었으며,
영의정 조두순이 비문을 지었다합니다.
대원군에게 전달한 이곳입니다
진산인 석문봉을 중심으로 좌청룡에 가야봉 우백호에 옥양봉
그 중심 끝에 명당을 점지 받았답니다
그곳에는 가야사라는 절이있었지요
대원군은 주지에 얼마를 지불하고 사찰을 불을 질러 버렸답니다
그리고 언덕 위 가야사 탑이있던 곳에
아버지 무덤을 이장하기로 맘 먹고 사람을 동원하여 터를 닦았지요
대원군은 큰뜻을 품고 아버지 남연군 묘를 이곳으로 이장합니다
먼길이지요 아버지를모신 상여는 지방을 지날때마다 그지역 주민이 동원되어
각구간을 연결하여 옮겼다네요
특히 남은들 지역 주민이 다른지역보다 더욱 극진히 모셨다하여
이때 사용한 상여를 남은들 상여라 불렀답니다
실물은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있고
이곳에는 모조품이 전시되어있지요
복제품의 한부분입니다
엄청 화려하지요
왕이 2명이나 나오는 프로젝트인데 이정도는 되어야겠네요
남연군( ?~1822)은 조선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 이병원의 아들로,
정조의 이복 동생인 은신군의 양자가 되어 남연군에 봉하여졌습니다.
죽은 뒤에는 경기도 연천에 그리고 이곳으로 이장되었는데
고종 5년(1868) 독일인 오페르트에 의해 도굴당하여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최근에도 유명한 풍수쟁이가 있지요 지관(地官)인 육관 손석우입니다
그는 생전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내로라하는 권력자 일가의
선영과 묫자리를 잡아준 것으로 이름을 날렸던 풍수가입니다.
1993년 펴낸 풍수 책 ‘터’에서는 전주 모악산에 있는 전주 김씨의 시조 묘를 살피고는
‘그 후손인 김일성의 절대권력 운이 이듬해인 1994년에 끝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두 달쯤의 차이가 있었지만 김일성은 손석우가 지목한 그해에 심장마비로 죽었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손석우의 도움을 받아 부모의 묘를 옮기고,
33년간 살던 서울 동교동을 떠나 경기도 일산으로 이사한 뒤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현대판 남연군 묘입니다
육관은 1998년 일흔둘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났답니다.
세간의 관심은 그의 묫자리로 쏠렸다.
당대 최고의 풍수가를 자처했던 그가 자신의 묫자리를 명당 중의 명당으로 봐두었을 텐데,
그는 과연 자기 묘를 어디에다 잡았을까.
치악산에 묘를 썼다는 얘기도 있었고, 고향인 울진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의 묘 행방을 찾는 호사가들의 발길이 한동안 이어졌답니다
그런데 근대 풍수계의 거목’이라고 불렸던 육관도사 손석우의 묘가 석문봉 아래에 있다.
하늘의 으뜸 별자리 기운이 지상으로 내려와 우주의 중심을 이룬다는 곳.
육관도사는 그곳을 ‘자미원(紫微垣)’이라고 했는데,
거기가 어딘지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지요.
그렇다면 손석우가 말한 자미원이 그가 묻힌 자리가 분명하지 않을까.
죽어서 스스로 최고의 명당자리를 차지한 셈입니다.
어째든 묘자리 덕분이었을까
고종은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게되고
민비를 아내로 맞이하게됩니다
고종과 결혼한 여흥 민씨 집안의 딸 '자영'
명성황후 집안은 힘도 없고 빽도 없었지만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추천으로 중전의 자리에 오른다.
흥선대원군은 그 당시 세도정치를 청산하고 며느리를 뽑을 때 집안이 약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집안의 딸과 결혼시킨 것이다.
그리고 명성황후는 인현왕후의 후손이라는 것이 좋게 작용했고
흥선대원군의 부인과 같은 집안이어서 처가의 도움도 받을 계획이었다.
세상일이 어찌 편안하기만 하겠는가
결국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와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웬일인가?
고종은 결혼한 첫날밤에도 명성황후를 외면하고 궁녀 이씨의 침소에 든다.
그 밤 명성황후의 심정이 어땠을까?
12살에 왕이 된 고종은 왕에 걸맞는 공부를 하느라 고생했다고 한다.
그다지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던 고종은 아마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이고 그럴 때 가까이에서 자주 보며 자신을 돌봐준 궁녀 이씨를 사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15살에 16살의 명성황후와 결혼을 했는데 마음은 계속 9살이나 많은 궁녀 이씨에게 있었다.
설상가상 고종5년에 궁녀 이씨는 아들 완화군을 낳았으니 명성황후의 마음이 어땠을까?
고종이 궁녀 이씨와 완화군을 각별히 사랑하고 세자로 책봉까지 하려고 했고 흥선대원군도 완화군을 예뻐해 퇴근 후에 매일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속을 끓이던 명성황후도 결국 임신을 했다.
명성황후는 아마 아주 기뻤을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에게 선물로 인삼을 주며 축하했다.
쇄항증.
그런데 무슨 일인지 명성황후의 아기가 태어나고 궁궐이 발칵 뒤집혔다.
갓 태어난 아기가 쇄항증을(항문이 닫힌 채 태어나는 선천성 기형 증상) 갖고 태어난 것이다.
이때 명성황후는 서양의 의술로 수술을 하자고 했으나 쇄국정책을 주장하던 흥선대원군은 반대했다.
결국 명성황후의 귀하게 얻은 첫째 아들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눈 앞에서 손도 써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명성황후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 뒤는 우리가 익히 알던 대로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은 계속 반대편에 서게 된다.
특히 고종이 직접 정치하는 친정을 한다고 했을 때 명성황후가 고종 편을 든 것이 흥선대원군과 척을 지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고종을 조종하고 부추겼다고 생각해 더욱 미워했다.
얼마나 미워했으면 임오군란 뒤 다시 권력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도망간 명성황후를 죽었다고 선포하고 시신도 없이 장례를 치르려고 했다.
명성황후가 어딘가에서 죽어서 다시는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지 않았을까?
두 사람은 만나면 안 되는 운명이었다.
명성황후는 평생 4남1녀를 낳았으나 모두 어릴 때 죽고 어른으로 장성한 자식은 순종 한 명 뿐이다.
순종도 평생 몸이 허약했다고 한다.
그래서 약한 자식들을 돌보느라 모성이 지나쳐 굿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면서 국고를 많이 낭비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명성황후도 자식 때문에 속을 많이 썩는 것을 보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느껴진다.
그럼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듬뿍 받던 궁녀 이씨는 어찌되었을까?
궁녀 이씨는후에 영보당 귀인 이씨로 불렸고 흥선대원군과 조대비의 힘을 빌려 아들인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했으나 명성황후의 미움과 고종의 식어버린 마음으로 인해 결국 완화군이 12살에 궁궐 밖으로 나가게 되었고 완화군은 13살에 죽게 된다.
완화군의 죽음에 명성황후가 개입되어 있는 지 아닌 지는 알 수 없으나 역사책에도 명성황후의 미움을 받아 죽었다는 가록이 있다.
궁녀 이씨가 아들을 세자로 만들고 영조의 사랑을 받아 궁녀에서 중전이 된 영빈 이씨 같이 되려고 한 꿈은 한낱 일장춘몽으로 끝이 난다.
명성황후라고 짐작되는 사진들이다.
그러나 세 명의 여인 중에 누가 명성황후인지 모른다.
그 당시 교류하던 외국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가운데 사진이 좀 더 유력하다는 말이 있긴 하다.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사진 한 장 , 그림 한 장이 없다니 그것도 미스테리다.
왕후였다가 죽어서 황후의 자리까지 오른 여인.
혼란한 시대에 권력을 휘둘렀지만 한 여자의 삶으로 봐서는 순탄하지 않은 인생을 살았던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