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2019.06.29. 서울성 북악구간
예정되었던 산행이 모집 인원이 적어서 인지
비 핑개를 대면서 취소 되었다네요
이럴 때는 참 막막하지요
금요일 저녁 마누라에게 산행 의향을 타진합니다
지난번 갔던 서울성이 어때?
요즘 마누라에게 투자 좀 했거든요
거금 주고 모양 기능 모두 살린 배낭도 사주고
또 요즘 핫한 메이커의 이쁜 등산화도 구입해 주었거든요
잠시 생각하고 콜을 을 외치네요
그리고 아침 7시 비가 조금 오지요
그래도 출발합니다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합니다.
서울성은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루고
성문은 사대문과 사소문이 있읍니다.
사대문은 유교에서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를 본 떠서 중앙 및 동서남북에 사용하였답니다
성 중앙에 종각을 세워 보信각(普信閣)이라하고
동대문을 흥仁문(興仁門), 서대문을 돈義문(敦義門), 남대문을 숭禮문(崇禮門)이라 지었으나
북대문에 知을 사용하여야 하나 당대의 권력자인 정도전에 의하여
백성이 너무 많이 알면 정치하기가 힘들고
백성은 다스려야 한다며 숙청문(肅淸門)으로 지었다가 후에 숙정문(肅靖門)으로 바뀌었답니다.
사소문은 대문 사이사이에 배치하였는데,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 소서문은 소의문(昭義門),
북소문은 창의문(彰義門),동소문은 혜화문(惠化門),남소문은 광희문(光熙門)이라 이름을 지었답니다
그중 광희문은 성안의 시체가 나가는문이라하여 시구문이라 불리기도 하였답니다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새로운 궁궐을 짓도록 하고 도성을 쌓았다. 도성은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연결하는 산의 능선을 따라 축성했다. 둘레가 약 20㎞ 된다. 처음에는 어디서 어디까지 성을 쌓아야 할지 계획이 서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도성 공사를 하면서 큰 눈이 내렸다. 눈이 하나의 선을 따라 선 밖에는 눈이 쌓여 있고, 안쪽으로는 눈이 없었다. 이성계는 이는 우연이 아니고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그 선을 따라 축성하도록 했다. 사람들은 눈이 울타리를 만들었다고 해서 ‘설(雪)울’이라 불렀고, 설울이 ‘서울’로 발음되면서 오늘날 서울이 됐다는 설이다. 따라서 서울이라는 지명은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생겼다는 얘기다
여러번 했지요
이번에는 하루에 몽땅 18KM를 돌았으면 했는데
사모님 걸음이 통~~~
버스타고 혜화문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성곽만 따라갑니다
경신고교 성북동 와룡공원 그리고 말바위 안내소에서 표찰을 받고요
숙정문 청운대 백악산정상 창의문안내소 인왕산
그리고 시직단으로 하산합니다
총거리가 18Km인데 9Km가 넘었으니 딱 반 한거지요
엄청 천천히 갔답니다
내 걸음으로 가다보면 혼자입니다
기다렸다가고 기다렸다가고를 반복합니다
5시간44분 걸렸네요
여기에 약1시간만 더하면 종주 하겠네요
다음에는 혼자 종주해봐야 겠어요
버스를 잘못내렸답니다
또 탈수도 없고 어짜피 걷기로하고 나온건데
1.5 정거장 정도를 걸어서 혜화문에 도착합니다
비가 아주 조금씩 내라고 있지요
일단은 우산을 들고 시작합니다
주택가속에있는 혜화문?
그래도 문화재인데 좋은건 아니겠지요
사대문 그리고 사소문이있지요
혜화문은 사소문중하나입니다
쉬운말로 동대문과 북대문 사이에 있는 동소문입니다
그 이름이 혜화문이지요
그래서 이동넨 이름이 혜화동이구요 동소문동입니다
주택가이지만
어째든 문화재를 살리려 많은 노력을 한 흔적은 있지요
이렇게 혜화문을 만나고 서울성 순례를 시작합니다
혜화문 북쪽 성곽입니다
서울성은 처음 축조당시 8도에서 노동력을 동원하여 쌓았답니다
아마 이쪽은 함경도 노동력이동원된곳일듯합니다
지도상 지역과 같은 위치라나요
길바닥에
도성순성길 상징인 동판이 우릴 외롭지 않게하네요
참 정말
어걸 어쩐다나요
성곽을 담장으로 쓰고 있네요
아마 사유재산이 되었나 봅니다
경신고등학교를 지나고 성북동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돈가스 집이 많은 곳이지요
음식점 이름에 역사를 담았네요
성북동의 엣이름이 마전터랍니다
성의 북쪽이라서 성북동이되었는데
그냥갈수있나요 찾아보았지요
피륙을 삶거나 빨아서 바래는 곳, 표백하는 곳.
가죽?
그이상은 없네요
이제 성북동 성곽길로 들어왔답니다
여긴 성곽이라기보다는 공원에 가깝지요
나무도 많고요 걷기도 편안합니다
그렇게 가면서
즐기고 있읍니다
멀리도보고요
가까이도 즐기면서요
그길에 흔적도 이렇게 남겨 놓구요
성곽의 안과 밖이 대조 되지요
성안사람들과 성밖사람들의 차이가 이랬을까요?
일부러 성밖을 택했답니다
역시 우린 성밖사람인가 봅니다
딱 어울리지요
우산이 있던 없던 성밖사람 맞지요?
성밖살람들의 삶입니다
텃밭이있어서 휴일인데도 쉬지않으십니다
인사하고 묻습니다
솔직히 부자이시지요?
성곽때문에 개축이 안되서 그냥 사시는것이지요?
재개발 조합 형성되어
재건축 협의 중 이시랍니다
테라스형태로 재개발 한다네요
무엇이 되어도 성곽이 죽으면 안되지요
성곽도 살고 사람도 살고요
친환경 울타리랍니다
엤날에도 이랬다지요
여기저기 많이 만들어 놓았군요
취병이라지요
말바위 전망대입니다
그림으로 위치 표시해놓았지요
지리공부좀 합니다
눈에익은곳 알만한곳 맞추어 봅니다
조각 맞추는 기분이지요
그렇게 찾은곳
사진으로 남겨봅니다
여기가 말바위라는데
뭐지?
초소?
여기가 초소인듯한데
왜? 말바위?
이게 말바위랍니다
우리말에 말자가 들어가면 모든게 크다면서요
바위가 그리 크지는 않은데요
바로 말바위 안내소로 옵니다
한가하지요
안내하시는분도 한가해 보이십니다
신분증을 준비해 갔는데
요즘은 없이 표찰을 주시네요
제도가 바뀌었답니다
믿고사는 민주시대니까요
표찰로 들어온사람 나간사람만 체크하면 되는가 봅니다
물론 말바위에대해서 물어보았지요
유래는 말을 이용해서 문무백관이 시를 읍고 녹음을 만끽하며 가장 많이 쉬던 자리랍니다
그리고 또하나는 백악의 산줄기에서 동쪽으로 좌청용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끝에있는 바위라하여 말바위란 이야기도있구요
예전에는 벼락이 많이 친다고해서 벼락바위라 불리기도 했답니다
표찰을 받고
안으로 들어와 보는 성곽은 좀더 삼엄합니다
기분이 그래서일까요?
그리고 바로 숙정문입니다
앞에 언급하였이 사연이 많지요
순리로는 지知지)가 쓰여야하는데
정도전에의해서 숙청문이되었다가 다시 숙정문이 되었다지요
서울성 북쪽에 위치하고 있지만
산속이고 길로 연결되지않아서 그리 많이 사용하지는 않았답니다
위치도 변경되어 개축되었다지요
계속해서 진행합니다
이구간은 오름구간이지요
왼쪽은 촬영금지 구역입니다
멀리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이 보이지요
예전 신혼여행 단골코스였었지요
그성 꼬데기입니다
둥그런 성이 뽀족 나온 곳이지요
치성입니다
성곽의 일부를 꼬리같이 삐죽 나오게ㅔ해서
적의 침입을 다른각도에서 감시하는용도입니다
물론 방어용으로도 만점이지요
이곳에서본 북악산 정상입니다
쭉 성곽이 이어져있지요
멋있습니다
엉겅퀴이지요
그냥 수수하게 보여주지요
이름모를 꽃이지요
까치수염이지요
그러면서 다시 성곽을 나갔다 들어갑니다
그 데크계단을 오르면
청운대가 되지요
아 청운동! 청운중학교가 이것때문이겠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인증한번하구요
다시 진행합ㄴ니다
각자성석입니다
글자가 새겨진 성벽 돌을 의미합니다.
성을 처음 쌓거나 보수하고 난뒤 공사에 참여했던 책임자의 이름을 적어넣은 것인데요.
요즘 말로 하면 공사실명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공사 후 문제가 생기면 책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고
공사 책임자들이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일할 수 있게 하는 역할도 했던 것입니다.
북악산 탐방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각자성석은 2곳이 있습니다.
청운대 근처 탐방로를 살펴 보면 영조때와 순조때 여장을 수리한 후
각자를 새겨넣은 성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있지요
나무에 점을 찍어놓았네요
뭐지?
121사태 소나무입니다
제가 중학교때인가?
북한의 124군부대가 특공대를 조직해서 청와대로 침투했던 사건이있었지요
생포된 간첩이 김신조씨 인데요
그래서 김신조 사태라고도 합니다
그들이 휴전선을 넘어 이곳까지 왔답니다
청와대 코앞이지요
이곳에서도 총격전이있었구요
그때 총맞은 소나무가 아직도 그상처를 가지고 있답니다
그리고 바로 백악산 즉 북악산 정상입니다
예전에는 이곳에 발칸포 기지가 있었다지요
지금은 모두 철수하여 다른곳으로 이전 했다지요
인증합니다
같이 인증해야하는데 찍어줄 사람이 안오네요
잠시 바위아래 밴치에서 휴식을 취하고요
드디어 사진사를 구했답니다
어렵게 구했는데
한장 더 찍어야지요
이제 하산입니다
하산길이 제법 가파르지요
앞에 인왕산이 보입니다
우린 저기까지 갈 예정입니다
창의문 안내소입니다
여기서 표찰을 반납하구요
창의문을 관람합니다
사소문중 북소문에 해당하지요
현판에는 창의문이라 되어있는데
흔히들 자하문이라 불렸던 기억이있읍니다
개성상인들이 이곳을 통하여 개성을 오갔답니다
그런데 이곳 경치가 개성의 자하문과 비슷하다고 자하문으로 불렸답니다
그래서 아직도 이곳을 자하문이라 하시는 분들이 계시지요
창의문이라 쓰여있는 정면입니다
역시 인증하나 더하고요
정식으로 창의문을 인증합니다
이곳에
경찰 동상이 2개가 있읍니다
이분들도 김신조 일당과 싸우다가 전사하신 경찰들이십니다
이분은 경사이시네요
이분은 좀 높으신분 인가봅니다
죽어서도 계급이 있네요
그분들의 공적이 적혀있읍니다
어렸을 때도 이곳을 왔던 기억이있는데
그때 감격했던 감정은 지금은 많이없어졌답니다
길건너에있는 윤동주기념관입니다
이곳은 예날 시민아파트에 수도를 공급하기위한 배수펌프장이었는데
그곳을 개조하여 윤동주 문학관을 만들었답니다
사실 윤동주는 연변사람이었지만
연세대학교를 다닐때 아래마을 부암동에서 하숙을 했다지요
이곳 언덕에 올라 많은 사색을 했던곳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위에윤동주 사색의 숲이 조성되어있구요
이런 정초석도 있네요
계속해서 성곽을 따라 올라갑니다
인왕산 정상까지도 성곽은 연결되어있지요
성곽넘어 인왕산 기치바위가 보입니다
오늘은 산딸기가 한창이네요
잠시 딸기맛도 보고요
계속해서 열심히 산행은 지속됩니다
잠시 쉼을 갔고요
아래를 바라봅니다
파란지붕집도 보이네요
그리고 다시 정상을 향해 올라가지요
오늘은 기차바위쪽은 생략합니다
바로 정상으로
참나리이지요
인왕산 정상 방문 기념으로
활짝 피어 주었네요
드디어 정상입니다
그래도 몇번 왔던 기억이있지요
338m 밖에 안되지만
예전에는 호랑이도 살았다 했지요
정상에서바라본 기차바위입니다
다시 인증하구요
인왕산에서 제일높은곳까지 오릅니다
그리고 이곳은 안산이니다
이곳은 오늘 안갑니다
그리고 성곽을 따라 쭉 ~~하산할것입나다
전망바위 이지요
여긴 그냥 통과했구요
바위위에서 휴식을 즐기시는 여인입니다
아직도 성곽은 계속되고요
우리사모님은 점점 지쳐가십니다
그리고 도로가 나오고
여기부터는 성곽 외부로 진행합니다
여기도 각자성석이있지요
이곳은 황해도 봉산사람들이 축성하곳이라네요
계속해서 성곽이이어지고
인왕산 산행은 여기까지입니다
계속해서 민가를 통과해서
사직단까지 왔답니다
그리고 오늘 순례를 마치지요
비를 맞으며 시작했는데
염려와 달리 좋은 날씨로 끝냈답니다
좀 아쉽다면 사모님이 좀 빨리 걸었으면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루에 완주 가능할텐데
이정도만 따라와 준것도 대단하다네요
다음에 혼자서 완주해야겠다는 결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