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3) 2016.03.19. 북한산 역사문화탐방
★ 북한산성은
백제 개루왕 5년(132년) 북한산에 최초로 성을 쌓았답니다
. BC 14년 온조왕이 하북위례성에 하남위례성을 옮긴 후 도읍지의 북방을 지키는 성을 쌓은 것입니다.
이성을 백제 고성이라합니다
★ 고려 우왕 때 최영 장군이 북한산 장군봉 아래 성을 쌓고 요동정벌군을 그곳에서 훈련시켰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맞아 북한산성에서 일전을 겨루려고 했단 기록도 있습니다.
이성은 중흥산성이라 합니다
★ 숙종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수난을 당하고 새로운 성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삼군영(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을 동원삼군영과 한양 백성, 기술자(석수, 목수 등), 모역꾼,
전국 승려를 부역시켜 6개월(4월~10월)만에 북한산성을 완공합니다
청이 알면 어쩌겠어요? 빨리 지어야겠지요
현대에 미사일이나 핵개발이 미국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것 처럼 말이지요
이때 지은 성이 북한산성입니다
오늘은 북한산성을 비롯해서
북한산에 대한 역사 이야기를 배우는 날입니다
아래 지도와 같이 우이동에서 북한산성으로 진행하는 순서입니다
우이구곡(7곡~1곡) - 종바위(부침바위) - 도선사 마애불 – 김상궁바위 – 용암문 – 용암사지(중식)
- 봉성암, 성능대사 부도(승탑)-구암봉(태고대, 천해대) - 태고사, 원증국사부도(보물),
- 중흥사 – 산영루 – 비석거리 - 용각사 사천왕상 선각화, 환희령 조망 - 북한산성 옛길- 백운동문 각자
- 중성문 성문, 수문, 시구문 – 향옥탄 – 칠류암 - 서암사 거북바위 – 민지암- 북 한산성 수문- 탐방안내소
진행은 산행을 겸하고요
해설을 듣고 또 산행하고 하는 식으로 진행했답니다
거리도 10km 나되었구요
시간도 7시간30분이 넘었답니다
09:10
오늘은 블랙야크 역사문화 탐방이있는날이다
09:30 집합시간이지만
문화인이 조금 빨리와야 하기에
조금 일찍도착했다
정면에 보이는 북한산
우측 버스 정거장 좌측이 도선사가는버스 타는 주차장이다
토요일 아침 많은 등산객으로 혼잡한 곳이다
잠깐후
사우나 건물앞에 낮익은 사람들이 보인다
그리고오늘의 주최자 전종현 셀파가 인원체크중이시다
빨간 옷의 전종현 세르파님
인원이 안맞는지 무척 고심하는 표정이지만
아마 치밀한 행사준비 중이실것이다
여기 역사문화 탐방
대여섯번 참석했는데
이젠 제법 아는 얼굴들이 많이보인다
이친구 처음부터 계속 본 친구인데 많이 어른이; 되었네요
성원이 되구요
자리를 옮겨 그린파크 호텔옆 고사가 중단된 냇가 쪽으로 갑니다
그리고 오늘의 역사문화 탐방이 시작되지요
먼저 우이 9곡에대한 설명입니다
구곡은 골이 깊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9개 선정하여 구곡이라 불렀단다
특히 여기 우이구곡에 관한 기록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계(耳溪) 홍량호(洪良浩ㆍ1724~1802)가
쓴 <우이동구곡기(牛耳洞九曲記)>에서 있는 9개의 경치좋은 곳을 오늘 찾아 보자는 것이다
구곡은 우이동 그린파크 호텔옆 계울에서 부터 도선사 까지 계곡을 따라 가며 경치좋은곳을 선정하였단다
우이구곡종 8,9곡은 현재 개발되어 현재속에 들어가 있어 찾을 수가 없구요
6,7곡은 문헌에 있으나 증빙이 어려워 추측으로 남아있답니다
이곳은 7곡 탕영암입니다
7곡은 위치가 확실치 않아서 측측하는 곳입니다 .
설명을 보면 '수백 보를 돌아가면 괴상하게 생긴 암석들이 휑뎅그렁하니 험준한 곳에
격류가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현재는 수량이 줄고 폭이 짧아진 계곡에서 격류를 볼 수 없고,
시멘트로 세운 담이 폭포를 만들고 있는 현재의 우이계곡에서 탁영암은 볼수없으나
제6곡 월영담입니다(역시 추측이지요)
선운산장을 지나 조금만 내려가면 계곡의 물이 잠시 모여 담을 이루고 있는 곳을 볼 수 있다.
제6곡인 월영담(月影潭)으로 보이는 장소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달그림자의 운치를 즐길 수 있는 곳인데,
밤이 아닌 낮에 찾아와서는 느낄수 없는것일까?
이곳이 아니라서일까요?
잠시 월영담은 내려놓읍니다
이길은 북한산 둘레길이기도 하지요
둘레길 따라 잠시오릅니다
이런 광장이있었던가요?
우릴 이 넓직한 광장으로 인도합니다
의도는 알았지요
늘 하던대로 각자 소개시간을 갖자는 겁니다
얼마나 상대를 알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그대로 진행합니다
그리고 세르파 소개도 합니다
작년하고 색깔이 바뀌었네요
레그야크인가요?
개중에는 작년엔 일반인이었던 분도 계십니다
영전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간단한 체조까지하고요
다시 우이구곡을 찾아갑니다
자 다들 모이세요
드디어 우이구곡에 빠져봅니다
저 담장 넘어에는
옛날 지장사가 있던 곳이랍니다
그리고 이곳
아까 설명했던 월영담 제2후보지입니다
아마 계곡이 많이 변했겠지요
그래도 담이라면 용이 놀던곳인데 이정도 물이 고여있어야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할레루야 기도원을 지나면서
도로가 아닌 이런 길로 갑니다
예전에는 무조건 아스팔트길로 갔었지요
북한산 산행 반이상을 아스팔트길로 다녔던 생각이 납니다
이젠 산길로 다닙니다
그리고 그데크길을 가다가 다시 도로를 만납니다
그 도로를 횡단하고 아래를 보면 이곳이 우이 5곡인 옥경대와 세묵지이다
말구유같이 생긴 바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옥구슬같다는거지요
또 그아래 먹을 닦았다는 세묵지입니다
내려가 보진 못하지만
랜즈를 땡겨 봅니다
바위위에 글이 마노이 쓰여있네요
역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던 장소인듯합니다
그리고 우이4곡을 만납니다
4곡은 진의강입니다
바람에 옷깃이 휘날리는 듯 시원하고 아름답다는거지요
잠시 시야를 계곡에서 도로 오른쪽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린
불심이 깊은 육영수여사가 1974년도에 도선사 가는길 산길을
큰돈들여 포장했다합니다
육영수 여사 법명이 금덕화라지요
우린
절벽위에있는 커다란 바위가를 주목합니다
우의 3곡 찬운봉입니다
계곡의 구름끝에 늠늠하게 솓아있는 커다란바위 봉우리
찬운봉입니다
그리고 다시 계곡으로 눈을 돌리면
이끼로 듬뿍 장식한 바위가 계곡속에 보입니다
제2곡인 적취벽입니다
이끼가 쌓여서 절벽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랍니다
그리고 길따라는 더이상 볼수 없답니다
저위 멀리 우의1곡인 만경폭포가 있답니다
이따 도선사에서 다시 보기로합니다
그리고 우이구곡에서 잠시 벋어납니다
그리고보이는 커다란바위
붙임바위 또는 종바위 입니다
자기 나이 만큼 돌을 비비고 그돌이 떨어지지 않으면
모든 소원이이루어진다지요?
그에 대한 설명이네요
종바위지나서
도선사 일주문입니다
도선사는 마애불을 만나야하지요
마애불 보기전 멀리서나마
우이 11곡인 만경폭포를 바라봅니다
저정도에 있겠다 생각하지요
도선사는 상당히 큰절입니다
서울에 있는데다가 한때 영부인이 관심을 가졌던 사찰이니
그때부터 많이 성장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저기 마애불같은게 벽을 장식하고있네요
하지만 우리가 찾는 마애불은 이것이 아니지요
도선사에도 윤장거가 있네요
쉽게 공부하는 법이 윤장거지요
책 집어넣고 나무아비타불만하면 머리속으로 다 들어온다지요
돌구 돌아서 마애불 찾아왔읍니다
신라시대 작품입니다
궁금합니다 어서 확인해야지요
마애불 앞마당이 온통 연등으로 장식되어있읍니다
신도도 많이 계시구요
마애불이 어디에 있지요?
눈을 여기저기 굴려봅니다
저기 같은데요
제단이있구요
그앞에 반듯한 바위가 서있답니다
그바위를 자세히 보니
부처님 옷깃과 손이 보입니다
그위를 쭉 바라보니 볼수가 없네요
밖으로 나가서 그 윗부분을 쳐다 봅니다
지붕같은것이 쳐져있읍니다
얼굴을 볼수가 없네요
마애불이있는 바위입니다
많이 크지요?
천년전 이커다란 바위에 많은 사람들 물떠놓고 기도 했을 겁니다
도선사 창건자인 도선국사가 불교 수행을 방해하는 바위 속 산신을 쫓기위해
장풍으로 바위를 반으로 가른 후 주장자(지팡이)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자연스레 바위를 숭배하던 사상이 불교로 바뀌도록 말이지요
마애불 순례는 거기까지입니다
뒷편 용암문 가는길 초입이니다
불상이 숲을 이루고 있지요
이것이 무엇이냐?
18나한불사상이랍니다
부처님의 18 제자가있었다지요
이들이 법당안에 있다면 그 법당 이름이 응진전이라 하지요
그러면 여기는 응진야인가요?
그18나한앞에서 무엇인가 간절히 기도하시는분계십니다
그리고 상당히 불교적인 나무 장식도 이ㅛ어서
더욱 18제자를 돋보이게 합니다
선생님과 학생들입니다
도선사 마애불앞 마당에서
야외 수업중이십니다
물론 퀴즈도 있구요
사찰내이지만 웃기도하고 분위기 좋읍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을 향해 출발합니다
잠깐입니다
앞에 커다란바위가있어 유심히 봅니다
그리고 그바위 돌아서면
이렇게 바위에 구멍이난 커다란 바위가 보입니다
김상궁바위입니다
궁궐에서 나온 김 상궁이 절에서 노후를 보내다가 죽은 후에 다비식을 치르곤 뼈를 넣은 사리공입니다.
. 일종의 납골당 인겁니다
구멍 속은 도굴을 당했는지 텅 비어 있습니다
자 이제부터는 산행입니다
용암문까지 땀 뻘뻘 내고 오름니다
그리고 숨이 목에 찰무렵 성곽이 보이고요
용암문입니다
성곽에는 대문과 암문이있읍니다
암문은 평상시에는 막아놓다가
유사시 비밀스럽게 사용하거나
적군을 몰래 기습할때 사용한다지요
만경대 남쪽 용암봉은 동쪽에서 보면 병풍 같아 '병풍바위'라고도 불립니다.
조선시대 용암봉은 '미로봉'으로 불렸는데,
용을 닮아 붙여진 이름입니다.
미로는 '미르'의 음운변화로, '미르'는 용의 옛말입니다.
결국 미로봉이란 우리 이름은 사라지고 한자 이름인 용암봉만 남습니다.
잠시 사진들 찍는 시간입니다
불랙야크 모자쓰신분 많이 보았는데요
지분은 정말 잘 어울리는거 같읍니다
오늘 선생님도 한장 찍어봅니다
그리고 진짜 학생같은 학생도 그려보고요
용암사지로 이동합니다
지금은 대피소 건물이 들어서있지만
예전에는 절이있었답니다
북한산성 건립을 승려들도 많이 참여하였답니다
그래서 여기 용암사에도 승병이 주둔했답니다
이부서진 탑은 용화사 석탑의 잔해입니다
석탑설명이구요
용화사지 아래편입니다
승병들 훈련장이었겠지요
여기서 낮에는 종칼로 훈련하고
밤에는 목탁들고 예불하였겠지요
지금은 음용금지 푯말이있지만 그당시 물맛이 좋았다는 기록도 있었다지요
기념사진 찍는다 합니다
난 찍는사람을 찍읍니다
사진사가 어찌난 많은지요
찍는 사람이나 찍히는 사람이나 비슷합니다
이동합니다
다음은 봉성암입니다
상당한 비탈길을 내려갑니다
그러더니 왼쪽 길다듬어진 곳으로 다시 오르기 시작하지요
'북한지'엔 봉성암에 관해 "구암봉 아래 25칸으로 성능이 창건했다"고 쓰여있다.
태고사에 머물던 성능 대사가 선방으로 만듭니다. 선방은 개인 기도사찰이라 해야겠지요
그래서인지 봉성암엔 성능 대사의 부도(승탑)가 있습니다.
이법당은 없는게 많지요?
단청도 없구요 현판이 없어요
현판은 없지만 법당이 서쪽을 향하고있고 여의주를 입에문 용이 장식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아미타블을 모신 극락전이랍니다
단청이 없는 용머리가 막 살아움직이는듯 리얼합니다
단청이 없다?
문살무뉘입니다
상부 창에 그려진 연꽃 문양역시 정교하구요
출입문 문짝에 꽃 모양입니다
그리고 아래 쪽 문짝에 도깨비 문양이구요
사실 단청이 들어가 화려할적에도 맛이있지만
이렇듯 오랜 나무 그색깔그대로 정말 중후한 멋이있읍니다
이봉성암은 6.25때 불타고 1970년대에 다시 지었다합니다
성능 대사는 북한산성을 축조당시 승군 대장으로 북한산에 주둔하여 40여년을 북한산에서 지냈다합니다
그러면사 북한지를 작성했다지요
그기록이 현재 산성을 찾는사람들에게 위치 유적들을 말해주는 근거가 됩니다
이곳 봉성암은 그의 개인 사찰이고요 이것은 그 성능대사의 부도탑입니다
이제 봉성암 순례을 끝내고요
봉성암에서 좌측 기슭을 따라 올라서 구암봉(龜岩峰)으로 향합니다
구암봉 가는길은 길이 없읍니다
가파르기도하지만 땅이 질어서 많이 미끄럽지요
오르기 쉽질 않군요
하지만 모두들 꾸역꾸역 오르고 있구요
그리 길진 않으니...
우와~~
이곳은 기도의 도량이랍니다
과연 찾을 만한 곳이지요
구암봉 거북바위 위 좌대는 고려 말 국사인 태고 보우가 좌선수행처로 삼을 만큼 명당지기가 충만한 곳입니다.
이곳에 올라 온김에 좋은 공기와 북한산의 청명한 기운을 맘껏 흡입합니다
저앞에 공사중인곳이 복원 중인 북한산성 행궁입니다
행궁은 임금이 머물수 있는 곳이지요
원래는 중흥사 근처에 만들려했으나 근처가 산산태가 자주 일어난다 해서 이곳에 세웠다지요
원기도 받고 인증도 합니다
누군지 뭔저 자리 잡으신 분입니다
무조건 눌렸답니다
그리고 또 다른분 역시 포즈를 취하는데
제 카메라 안에도 들어오셨읍니다
저도 정기를 듬북받아야겠지요
대남문은 안보이지만 행궁터는 확실이 들어왔네요
그후도 거의 모든사람들이 인등합니다
멀리서지만 사진 한장더 남깁니다
다음 목적지는 중흥사의 동암 태고사로 갑니다
비탐지역이지만 길은 선명합니다
그길을 따라 내려가지요
원증국사 태고 보우는 고려 공민왕 때 왕사 그리고 우왕 때 국사로 임명된 불교나라 고려의 큰 어른이었습니다.
현대 불교계의 종정 격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고려의 주체이념이 불교였기에 현대 종교 중 하나인 불교의 수장보단 주류측이 인정하는 나라의 큰 어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불교계는 모두 태고 보우를 따릅니다.
보우는 고려시대 양근(지금의 양평=양근+지평)사람으로, 승과 급제 후 중흥사 주지를 맡아 중건하곤 중국에 유학을 다녀옵니다.
이사리탑은 그의 사리가 들어있읍니다
물론 보물이구요
이곳에는 또하나의 사리탑이있읍니다
이 사라탑은요
태고종 종주인 법운대종사의 사리탑입니다
사실 시기적으로 얼마 안되어서 가치는 그렇지요?
그 사리탑 제단에 쓰여있는 글귀입니다
그리고 바로 태고사 경내로 들어섭니다
그러니 어떤 모양이던 상관 없겠지요
양옥집 같이 생겼지요?
원래 산신각은 절이생기기전 이땅에 신들에게 양보한 사당입니다
부교가있는 사찰이지만 원래 주인에게 예의를?
그러니 어떤 모양이던 상관 없겠지요
그런데 참 이쁘네요
대웅전 좌측 비각 속엔 '보우국사탑비(보물 제611호)'입니다
문장가 목은 이색이 쓴 비문엔 보우의 문도들 이름이 쓰여 있답니다,
그 중엔 ‘판문하 최영', '판삼사사 이성계' 등 귀에 익은 이름도 있습니다.
비문 중 조선시대 유생들이 이성계의 이름이 있는것을 불편하게 생갈하여
가운데 글자를 쪼아냈다는데요
'성' 자가 사라진 '이○계'로 만들었다지요?
그글자를 찾기 힘드네요
여기도 쪼은 자국은 있지만 이0계는 아닌듯합니다
영조가 비각을 지어 비석을 잘 보존햐여 오늘까지 왔다지요
태고사 대웅전입니다
아니요 대웅보전입니다
대웅전과 대웅보전의 차이를 아시나요?
대웅전은 거룩한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법당이란 뜻이다.
그리고 그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이나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또는 대세지보살을 협시보살로 봉안하는 경우도 있다.
대웅보전은 대웅전보다 격을 높려
보살대신 부처를 모신다
좌측에 아미타불과 우측에 약사여래불을 모셔 부쳐만 세분이 있는경우 대웅전의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 부른다.
태고사는 대운보전이다
태고사 멀지않은곳에 또하나의 사찰이 보인다
바로 북한산의 메인 사찰 중흥사이다
하지만 증흥사도 625때불타고 보이는건 최근에 다시 중건한 건물이다
태고사에서 내려와서
오른쪽은 행궁지 가는 길이지만
ㅎ행궁지는 복원중이라 별의미가 없어 진행방향으로 간다
그리고 바로 보이는 표시가 중창지이다
중창지는 군수 창고이다
가운데있는 창고이고
당연히 상창지도있었을태고 하창지도있었을것이다
지금은 흔적도 발견하기 쉽지않다
이렇게 표시를 해주니 우린 자연히 역사공부를 하는것이다
그리고 비석이있는 읷이 중흥사지이다
엄청 컸을법한 사찰이지만
지금은 그냥 그렇다
그 영화를 여기 안내판으로 대신한다
그리고 비석거리
관리의 덕을 기린 비석을 모아 놓은 암반으로 처음엔 거사비(去思碑), 유애비, 청백비, 청덕비, 정충비가 세워지다가
점차 덕정비, 선정비, 공덕비로, 나중엔 생사당(산 사람의 제를 올리는 사당)까지 지어졌답니다
오리대감 이원익의 생사당이 초기고, 구한말 부패관리가 이임하며 생사당을 짓는 게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주민들은 부패관리가 떠난 후 생사당을 허물거나 부수는 일도 일어납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사찰 용학사로 들어갑니다
그용학사에는 아주 값진 벽화가있지요
바위에 그려놓은 사천왕상입니다
오래되어 윤각이 희미해지자
주지스님이 보수를 생각하셨다지요
그래서 시멘트로 미장을 하고요
그위에 바위에있던 그림과 똑같은 사천왕상을 그려 놓았답니다
그래서 보물이 되어야할 유물이 보물 지정을 못받았다지요
아쪽에서 바라본 능선입니다
최고의 경치라고 북한지에 적혀있답니다
환희령이라고요
그렇게 보이시나요?
용학사 경내는 조각 공원같읍니다
여기저기 조형물로 가득합니다
특히 불상을 아연강판으로 둘러 싸아놓은 모습이 특이합니다
또하나 북한산의 최고의경치라는 산영루입니다
어째든 이곳은 놀기좋은곳이었답니다
ㄷ다시 최근에 복원한듯하지요
어째든 이곳은 놀기좋은곳이었답니다
백운동문이라 쓰여있네요
군과의 소통을 위해 명찰을 붙여놓은듯합니다
군사요충지인이곳
군과의 소통을 위해 명찰을 붙여놓은듯합니다
그리고 숙종이 북한산성을 한바퀴돌고요
이곳이 지대가 얕으니 성을 보강하라 지시하셨다지요
그때 노적봉에서 증취봉을 연결한 중성(重城, 겹성)을 쌓습니다
이문은 중성문이구요
중성문옆에 계곡이있답니다
성를 통과하는 물을 관리하는것도 대단히 중요하겠지요
물은 통과하고 적은 막아야하겠지요
그래서 일반 성곽보다 특별한것이 수문입니다
지금은 소실되어 없지만요
중성문과 수문사이에 자그마한 암문이있지요
성내에서 사람이죽으면 대문으로는 나갈수가 없답니다
그래서 이런 암문을 만들어서 시신을 ㅐ보냈답니다
그래서 이런문을 시구문이라 불렀답니다
이곳이 수문이있던곳이고
그때 군사들 수문을 감시하기위한 흔적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성이 쌓였겠지요
물은 흘렀을테고
그물은 병사들이 지켰을겁니다
수문넘어 연결되었던 성곽의 흔적들입니다
중성문 윗편이구요
그 수문자리에 한여인이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좀더 가까이 해보지요
참 미인이십니다
얼쿠~~
ㅂ바로 바비한테 잡히셨군요
그리고 쭉 저와 같이하셨던분도
제카메라에 잡히셨네요
그리고 북한동 역사관입니다
이곳엔 예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다합니다
대부분 성곽을 지키는 군인들과 그가족이었겠지요
그러다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장사를 하는 직업으로 바뀌었다가
국립공원이 되면서 모두 이주하고
지금은 기념관으로 남아있답니다
그이주전후의 그림들을 게시하였네요
다시 하산합니다
서암사터입니다
서암사는 수문을 관리하던 승려들의 숙소도했구요
예불도 드리는 사찰이었답니다
지금 한창 복원 중인 서암사가 계곡 옆에 있습니다.
서암사 터는 고려 충숙왕 때 재상을 역임한 민지(1248~1326)의 별서가 있던 곳입니다.
창건 초기엔 민지사(閔漬寺)로 불리다가 명신(名臣)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조선 유신들의 주장으로 조선시대 서암사(西巖寺)로 바뀝니다.
복원 중인 서암사엔 서암사 상징인 거북바위가 있다는데요찾을수가 없지
요영험하단 거북바위를 시계방향으로 세 번 돌면 어쩌는지 아시지요?
그때 스님한분이 나타나셨답니다
그리고 거북바위 이야기를 하십니다
문헌에 나와있는 거북바위는 개울건너 저기 커다란바위랍니다
사찰경내에있던 바위는 아무것도 아니라 공사중 뭇어버렸답니다
그 스님이 말씀하시는 거북바위가 이거랍니다
하지만 우리 선생님은 이게 아니랍니다
그중요한 바위를 묻었다고요?
고려 민지가 놀던곳 민지암이라 있는데요
지금 서암사에있는 이바위가
후보1번입니다
그리고 조금 내려와서 이곳이 후보2번입니다
눈썹바위 아랜 평상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수십 명이 앉아 놀만한 곳입니다.
이곳 역시 고려 충숙왕 때 재상 문인공 민지가 소요하던 곳으로 조선시대 들어
북한산에 온 양반들 역시 풍류를 즐기던 장소였답니다.
여기쯤 되는건가요?
그리고 이곳은 원래 성곽이있던곳의 수문터라지요
사진으로보니 엄청나네요
수문이5개난 홍예로 되어있지요
그 성돡의 좌측이고요
여기는 우측입니다
이것이 정말 옛성곽의 모습인데
지금 대동문옆에 새로 쌓은 성곽은
복원이 아니라 개축한거지요
이곳에서 다들 모여서 마무리합니다
4월9일 모악산 역사탐방있다지요
꼭 참석할겁니다
꼭 붙야주세요
마지막으로 인증합니다
장장 7시간30분이 소요했답니다
정말 열심히 설명해주셨는데요
얼마나 기억할수 있을까요?
반복학습이 중요하다하셨는데요
전 이렇게 리뷰했답니다
고맙습니다